[역사속의 오늘-6월 1일]‘악질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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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 1일]‘악질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6.0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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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99년 오늘 일제 강점기 시절 고등계 형사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는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으며 광복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중용되어 좌익계 검거와 정권 장악에 앞장선 노덕술이 출생했다.

그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 요인 암살 음모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으로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에 복귀하여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 간부로 영전했고, 이후 헌병으로 변신하여 1955년 서울 15 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노덕술은 평생을 친일과 반민족적 행위로 일관하다 1968년 4월 1일 사망했으며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노덕술
노덕술

▲ 고문 귀신

그의 일본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鴻)로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 공립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한 뒤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홋카이도에 건너가 돈을 벌었다. 

1920년 귀국한 그는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9월부터 경남 경찰부 보안과 순사가 되어 친일 경찰의 첫발을 내디딘 후 울산경찰서 사법계와 순사부장을 거쳐, 1924년 12월 경부보에 승진하고 의령ㆍ김해ㆍ거창ㆍ통영 등 각 서의 사법 주임을 맡았다.

이후 김해경찰서와 거창경찰서 그리고 동래경찰서에서 경부보로 사법 주임을 지냈으며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8년 6월 동래 고등 보통학교와 부산 제2 상업학교 동맹 휴학을 주도한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ㆍ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1928년 10월에는 동래 청년동맹 집행 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공표(박일형)를 체포하여 고문했다.

1928년 12월 조선 공산당 사건과 관련한 제보를 받고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1929년 12월 동래 고등 보통학교 학생 문재순ㆍ차일명 등이 광주 학생 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 휴학을 일으키자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이들에 대한 고문을 자행했다.

노덕술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이 기간에 일제 침략의 정당화를 위한 여론 환기 및 선전 활동과 친일 좌담회를 주최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1940년 4월에 공로상과 1941년 3월에 훈 8등 서훈을 받았다.

1943년 9월 30일, 노덕술은 오늘날의 총경급인 경시가 되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영전했는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조선인으로서 경시를 단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변변찮은 학력을 지닌 그가 경시가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친일에 매진했는지를 보여준다.

광복 후 평양 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할 때 소련군이 진주하자 월남하여 장택상에 의해 1946년 1월에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에는 제1 경무 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 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했다.

당시 수도경찰청 간부들은 이주호 통신 과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고 전국적으로도 경위 이상 1157명의 간부 가운데 946명(81.8%)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반민특위 와해

그로부터 몇 달 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암살사건의 범인 한현우를 검거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반공 투사라며 극구 치하했다. 그러나 재직 중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하고 시체를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던 중 수도경찰청 부청장의 신원 보증으로 일시 석방되자 도주했다. 

1948년 10월 도주 중 수도경찰청 수사 지도과장 최난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고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반민족 행위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이 무렵 노덕술 등에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관계자에 대한 암살 지시를 받은 백민태의 자수로 암살 모의 전모가 밝혀졌다.

그에게는 반민법 위반 외에도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 반민특위 요원 암살 음모 사건 등 혐의가 추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하고 특위법 개정까지 시도했으나 반민특위는 그의 석방을 단호히 거절했다.

얼마 후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 등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노덕술은 석방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노덕술은 헌병으로 전직하여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으로 대공업무를 담당했으며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반 이승만 인사가 대거 당선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헌병대와 특무대를 앞세워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 감금한 다음 개헌을 강요해 정권연장에 성공했다(부산 정치파동).

이후 제2 육군 범죄수사단 대장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1955년 11월 육군 중앙 고등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파면되어 고향 울산에서 생활하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68년에 사망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 요인 암살 음모 사건

1948년 10월 하순 수도청 수사과장실에는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와 노덕술이 모여 반민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과 정부 요인들에게 암살과 테러를 시도한 사건으로 테러리스트 백민태가 자수해 미수로 그친 사건이다.

이 음모 계획 사건의 기소문에 의하면 재정 문제는 반민특위에서 제1호로 체포한 박흥식, 언론 분야는 이종형, 경찰 분야는 노덕술이 담당했다고 하며 암살 대상자는 김병로, 권승렬, 신익희, 김상돈, 김상덕과 특별 재판관 서순영, 오택관 홍순옥, 최국현, 특별 검찰관 서용길, 서성달, 곽상훈, 청년단체 관계자 유진산과 김두한, 이철승 등이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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