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5월26일]‘발췌 개헌‘... 부산정치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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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5월26일]‘발췌 개헌‘... 부산정치파동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5.26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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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952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 전쟁 중의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억류한 정치적 파행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반민주적ㆍ반의회적 정치 행위를 일상적으로 반복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장기 독재의 출발점이었으며, 국가 권력과 폭력 단체ㆍ우익 청년 단체 등을 동원하여 자행한 직접적인 정치 폭력으로, 우리나라 헌정사에 길이 남을 정치 폭거이다.

이 폭거를 통해 이승만은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압도적인 득표로 연임에 성공했다.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연행되는 모습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연행되는 모습

 

▲정치적 배경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과 야당 의원이 압승을 거두자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개헌을 준비하고 새로운 여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1951년 11월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ㆍ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고, 여러 보수단체와 우익청년을 규합하여 1951년 12월에 각기 자유당이라는 이름이 같은 두 개의 정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52년 1월 정부가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고,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4월 17일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원외 자유당을 비롯한 18개 사회단체가 개헌안반대전국정당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의원 내각제를 추구하는 국회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려는 정부와의 전면적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4월 20일 장면에서 교체 임명된 국무총리 장택상은 취임과 더불어 ‘개헌안 4개 원칙’을 발표해 내각 책임제를 지지하는 의원들을 포섭ㆍ분열시켰다. 

또한, 내각책임제를 주도하던 서민호 의원이 현역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고, 국회가 정당방위라며 서민호 의원 석방 결의안을 채택하자, 이를 빌미로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어용단체를 배후 조종하여 국회 해산과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요구하는 관제데모를 부추겼다.

극도의 혼란 속에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ㆍ북도 일부 지역에 공비소탕의 구실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소장 원용덕을 임명했다.

이에 따라 언론 검열이 실시됐고, 5월 26일에는 국회 의사당으로 등원하던 야당 의원 48명이 탄 전용 버스를 의사당 정문에서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했다.

헌병대에 끌려간 국회의원 가운데 곽상훈, 서범석 등 야당 핵심 의원 12명은 국제 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부산 정치파동’이다.

그러나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6월 4일 정부는 국회 해산을 보류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제안한 정부 개정안과 국무총리 제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면,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 결의권 등을 제안한 국회 개정안이 절충된 ‘발췌 개헌안’을 추진한다.

이에 개헌 결의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국회의원에게 신분보장 및 구속 중이던 의원을 석방하여 국회에 등원하게 하였고, 경찰과 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기립표결을 실시하여 1952년 7월 4일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정부는 7월 7일 개정 헌법을 공포하고, 비상계엄령을 해제함으로써 부산 정치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정치적 의미

이승만은 부산 정치 파동을 주도하면서 결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집권자가 헌법을 개정하여 집권연장에 성공했고, 계엄령으로 정권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군부가 국내 정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개입을 고려한 사건이었다. 

이때 유엔군이 지지해준다면 한국군이 행정부와 계엄사를 접수하여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보장할 것이라는 군부의 제안은 6월 4일 이승만 지지와 군사개입 반대라는 미국의 최종 결정으로 유야무야 된다. 부산 정치파동 이후 4ㆍ19나 광주 민주항쟁에서 보듯이 항상 한국군의 정치개입 또는 불개입의 배후에는 암묵적으로 미국의 의사가 작용했다. 이는 한국정치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다음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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