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6일]임진왜란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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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6일]임진왜란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7.0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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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599년 오늘 임진왜란 7년간 조선 군대를 총지휘했으며, 이치 전투와 독왕산성 전투 그리고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한 조선의 명장 권율이 사망했다.

그는 이순신과 더불어 전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구국의 명장으로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율 영정{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권율 영정[출처=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호남을 지키다

권율은 중종 32년인 1537년 12월 28일 강화도에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후에 영의정에 오른 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하다.

1582년(선조 1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이어 전적ㆍ감찰ㆍ예조 좌랑ㆍ호조 좌랑ㆍ전라도 도사ㆍ경성 판관ㆍ의주 목사 등을 두루 지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에 광주 목사에 임명된 후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주도로 경상감사 김수, 충청감사 윤선각이 이끌고 온 5만여 명의 삼도 군사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참여한 용인 전투에 방어사 곽영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권율은 임진나루를 확보하고 적의 틈을 살필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왜군의 매복으로 크게 패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권율 장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겨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해 가을 그 공을 인정받아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됐다.

▲한양 수복

그는 병마절도사 선거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독성산성)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연락이 두절될 것을 염려하여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독왕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권율은 전면전을 피하고 성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유격전을 전개하여 왜군을 격퇴했으며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다. 이 작전으로 권율은 왜군을 도성에 묶어두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얻었으며 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했다.

개전 이래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했던 왜군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에서 개성으로, 또 개성에서 한양으로 퇴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전황을 파악한 권율은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선거이에게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소수의 관군과 처영의 승병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친 후 책(柵)을 설치했다.

왜군 총대장 우키타는 3만의 병력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ㆍ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적들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대패한 왜군은 후퇴하면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불태워 타다 남은 시체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ㆍ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 승리는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으로 이순신의 옥포대첩,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4 대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행주대첩은 분명 조선 육군의 위용을 보여준 승리였으나 명나라 총사령관 송응창(宋應昌)은 왜군을 공격한 것이 왜와의 강화에 방해가 되었다는 이유로 권율을 질책했다.

이후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적들로부터 오래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파주 산성으로 진을 옮겨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휴전 상태가 되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으며, 1596년 도망병을 즉결 처단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 판윤에 기용되었고 이후 비변사 당상관,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결국 도원수에 재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명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은 임진왜란 발발 한 달여 만에 왜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구원 요청과 조선이 왜에 넘어가면 명나라에 가해지는 위협이 크다고 생각하여 명나라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원군으로 온 명나라는 조선을 무시해 왜와 일방적으로 강화를 진행하면서 조선을 소외시키고 작전 지휘권을 차지해 왜군과 마음대로 싸우지 못하게 했다. 명나라의 목적은 왜가 조선을 점령해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강화 협상은 진전 없이 4년여의 세월만 보내다 명과 왜의 의견 차이가 커 결국 강화 협상은 결렬되었고, 1597년(선조 30)에 왜가 재침하는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하여 적과 맞섰으나 명나라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고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권율ㆍ이순신의 활약과 1598년 8월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왜군은 철수하면서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으며 권율은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사망했다.

시호는 충장(忠莊)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 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 되었고,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하여 그해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 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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