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 8일] 일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0월 8일] 일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10.08 1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에게 암살 ‘을미사변’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일명 명성황후 암살 사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당시에는 을미의 변 또는 을미 팔월의 변이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를 암여우라고 불렀으며, 작전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 개요

명성황후 추정 사진
명성황후 추정 사진

일본 제국은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려 했고, 조선 측에서도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전 군부협판 이주회, 개화파 문신 유길준, 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 등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통과 협조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일본인 낭인들은 조선인 군관들의 비호와 길 안내로 경복궁까지 3~5시간 내에 진입했다.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진입한 이들은 궁녀 복장으로 위장한 황후를 찾아내 시해한 뒤, 미우라의 지시로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졌다.

사후 100년 넘는 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에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 공개됐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에 을미사변 표지기사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에 을미사변 표지기사

을미사변의 범행은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배후의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 직전에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최고위 원로들과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각료들이었다.

당시 을미사변에 실행자들은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해 황후 시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지만,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고 사건의 범행자들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였던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이 현장을 목격했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