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 17일]조선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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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 17일]조선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자영‘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1.1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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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851년 오늘(음력 9월 25일) 개화의 선각자이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가 출생한 날이다.

그녀는 대한제국 고종의 정실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의 생모로,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고종을 보좌해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하였다.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명성황후는 1895년 8월 20일 일본군과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된 뒤 시체는 불태워졌다.

명성황후 초상 [사진출처: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초상 [사진=명성황후 기념관]

▲조선의 여걸

명성황후는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민치록과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여흥 민씨는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와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였던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집안이 몰락하여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여겨 그의 아내 부대부인 민 씨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녀를 고종의 왕비로 적극적으로 추천하였고, 1866년 명성황후는 왕비로 간택되었다.

대원군은 본래 안동 김씨 집안의 딸을 왕후로 내정했지만, 그 약속을 어김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과 척을 지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결혼 초기에는 고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낳은 첫아들은 선천적 기형으로 5일 만에 죽고 때에 맞춰 대원군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 씨의 소생 완화 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대립은 시작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여흥 민씨 삼방파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 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 대원군 세력 등과 제휴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스무 살을 넘긴 고종이 직접 정사를 보고자 하는 욕망과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 실정을 거듭되면서 최익현에게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하여 1873년 대원군을 정계에서 밀어냈다.

그러나 그해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후에도 조정에서 대원군의 힘은 막강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자신들만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민 씨 일족을 대거 등용했다.

1874년 출산한 둘째 아들 척(훗날 순종)이 이듬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명성황후는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여 청년 개화파 인재들을 중용하였다.

▲격변의 시대

그녀는 1876년 조선 정벌의 야심을 가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자 강화도조약(조일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등을 파면ㆍ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ㆍ공업 등을 학습하게 하였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서구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껴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국방비를 증액하지 않고 기존의 예산에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군영의 운영비는 항상 부족했다.

1882년 결국 견디다 못한 오군영 병사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하고 황후를 죽이려 했으나 황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주(장호원)까지 도망가 목숨을 구했다. 

그녀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사태 수습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기고 대원군은 오군영에 정상적인 급료 지급과 별기군 폐지를 약속하고 왕비의 가짜 국장을 치러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한 달 후 대원군은 파병 온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었고, 명성황후는 50여 일 만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더욱더 위기를 느낀 명성황후는 민 씨 일족과 청나라에 더 의지하게 되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를 느껴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영익이 중상을 입고 많은 민씨 일파가 피살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삼일 천하’로 끝나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 후 그녀는 외교면에서 여러 통로를 개척하면서 국정 전반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오랜 외척의 득세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순식간에 전주를 점령하고 충청도까지 위협하는 등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을미사변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으나 톈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 군대도 조선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여, 1894년 일본군은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4대 문을 접수한다.

일본공사 오또리 게이스케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협하여 일본이 말하는 소위 ‘조선왕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면서 강요에 의해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야욕으로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895년 3월 23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으로 4월 11일 일본은 요동반도의 영구적인 점령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3국 정부에 전달했다.

러시아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키 위해 친러파를 내각에 중용하여 친일파를 제거하였고, 고종은 “작년 6월(갑오경장) 이래 칙령이나 재가 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의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앞으로는 임금 자신이 매일같이 정부의 대신들과 접촉하여 대소의 정사를 심의 결정하고 친재한 다음에야 실행토록 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해 왕권 회복과 일본 지배의 거부를 표시했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조선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로 생각하여 제거할 계획을 세워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 낭인이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을미사변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고,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1895년 폐서인 되었지만 같은 해 다시 복위되었고, 2년 뒤인 1897년 10월 대한제국 수립과 더불어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양주 천장산 아래 국장 되어 홍릉이라 하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으로 옮겨져 묻혔다.

21세기에 접어들어 경기도 여주 생가에 명성황후 기념관이 들어서 매년 추모 행사를 하고 있고, 명성황후의 일생을 조명한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가 제작되어 한류 창출에 기여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명성황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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