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칼럼> "아래 것들은 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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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칼럼> "아래 것들은 나가 있어"
  • 이영수 기자
  • 승인 2014.07.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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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가있어... 천박한 것이 어딜...” 영국의 권위있는 귀족, 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찬 3세로 분장한 한 개그맨이 자신의 몸종에게 던진 이 말은 공중파를 통해 TV시청자들에 씁쓸하지만 폭소를 터트리게 했다. 지금도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콘서트 중 봉숭아학당(지금은 종영됐지만)에서 만들어진 이 유행어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용하며 키득키득 거렸다. 당시 이 유행어는 신경질적이고 독선적인 상류계층(지도층)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계층을 무시하는 발언으로, 계층 간의 골 깊은 갈등의 현실을 풍자했기 때문에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감히 아래 것이 고매한 귀족의 말에 끼어들다니... 가당치도 않다는 유행어가 새삼 기억에서 살아난다.

 #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보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며, 부엉이는 서양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니 미네르바의 부엉이란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철학자)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질 무렵 비로소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문구를 놓고 학자들마다 여러 해석을 내놓지만, 학자들의 공통점은 “모든 일은 지난간 뒤에 분명해 진다”는 것이다. 낮에 온갖 일들이 벌어지면, 부엉이는 황혼녘 나무에 앉아 낮에 벌어진 일을 바라보며 오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판단한다. 참으로 고고한 자세다. 선견지명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현재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결과를 알게된다. 변증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칙을 제시한 헤겔의 눈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본 것은 아닐까. “어찌 뱁새가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대를 앞서가거나 평범한 사람 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고독하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분명 옳은데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아래 것들이 뜻을 모아 자신을 비난한다고 오히려 역정을 내기도 한다.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누가 봐도 자신이 잘못했는데, 그것은 아래 것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뜻을 아래 것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둘러댄다. 그러면서 과거에 찬란했던 공적을 내세우며 현재의 잘못을 덮고, 앞으로는 더욱 잘 될 것이라며 아래 것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자신의 판단은 맞으니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래 것들은 이미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따르지도 않는다.

 #이번 월드컵에서 1무2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낸 홍명보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 유임됐다.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홍 감독의 책임이 아닌 축구협의 책임”이라며 홍 감독 유임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 부회장은 “이번 실패는 홍 감독 책임으로 돌리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따라서 홍 감독 사퇴는 옳은 결정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홍 감독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올림픽에서의 좋은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찬양한 뒤 “책임론은 공감하지만 홍 감독을 지지한다”고도 했다. 허 부회장의 이러한 말은 곧 축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국민들의 여론 때문에 훌륭한 감독을 경질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들린다. 책임지겠다는 관계자도 나타나질 않는다.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아래 것들이 뭘 아느냐”는 식이다. 적어도 그렇게 들린다.

 #지금 한국축구는 한국정치와 닮아도 너무 닮아있다. 분명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은 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월드컵에서의 처참한 성적과 세월호 사건, 연이은 국무총리 낙마, 장관 후보 청문회 등으로 나라가 시끄럽기만 한데 누구 하나 나서서 이를 진정 시키려는 사람이 없다.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이해와 설득, 사과도 없이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그러면서 중앙아시아 순방과 중국 시진핑 방한에 우아한 모습으로 외교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내치는 없는 듯하다. 봉황의 뜻을 뱁새가 알아주기 전에 봉황이 먼저 뱁새를 이해시키고 안심시켜야 한다. 세계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아래 것들은 어지럽기만 한데 정작 맘 편히 기댈 곳이 없다. 아래 것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고귀한 귀족 '세바스찬'을 기대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생각일까.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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