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바다에서 일제와 싸운 '강화의병 30명'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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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바다에서 일제와 싸운 '강화의병 30명' 발굴
  • 문종권 기자
  • 승인 2022.02.07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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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지난해 10월 13일부터 강화의병 발굴...
강화의병 발굴 관련 일본 기밀보고서 

[미디어인천신문 문종권 기자]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강화의병 30명을 발굴했다. 강화 출신 25명과 당시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던 타지 출신 5명이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7일 지난해 10월 13일부터 강화의병을 발굴한 결과를 이 같이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의병장과 의병은 김용기(金龍基)・이능권(李能權)・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진(義陣:의병부대) 소속 의병장과 의병이 대부분이며, 강화의병은 육지에서는 이능권 의진, 바다에서는 김용기·지홍윤 의진이 의병투쟁을 벌였다.

[이상 자료=인천대학교 독립연구소]
강화의병 발굴 관련 사진자료  일본 치하야함 [이상 자료=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이들 의병장 의진에서 활약했지만 아직 포상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용기 의진의 금찰장(禁察長) 고재환(高在煥)・소모장(召謀長) 김장석(金長石), 이능권 의진의 참모 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지홍윤 의진의 고부성(高夫成)・김신명(金愼明)・장동섭(張東燮) 등이다.

아울러 강화도에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인 의병장 김태의(金泰宜)・오윤영(吳允榮)・장인선(張仁善) 등이다.

지홍윤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강화진위대에 부교(副校)로 근무했고, 제주도에서 전역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제는 1905년부터 강화진위대를 강화분견대로 축소했고 1907년 8월에는 군대까지 해산했다. 이에 지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켜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 도서지방과 황해도 평산・배천・연안군까지 김용기 의병장과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된 인물로 기록돼 있다.

일제는 강화의병 진압을 위해 러일전쟁 때 통보함(通報艦)으로 활약했던 군함 치하야[千早]와 사기[鷺]・우즈라[鶉]・하시다카[鷂] 등 쾌속 수뢰정(水雷艇)을 동원,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왕래하는 의병들의 나룻배나 어선을 공격했다.

또 육지에는 육전대(陸戰隊)까지 투입, 약 6개 월 동안 의병 진압에 나섰다. 김용기·지홍윤 의진은 7척 선단을 구성,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방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전개했으며, 이는 한말 의병사에 전무후무한 것으로 파악됐다.

독립운동사연구소 관계자는 “정부에서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시작한 1962년 이래 현재까지 강화 출신은 8명에 불과했다”면서 “이번 30명은 3배가 넘는 유공자를 발굴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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