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 4일] 구한말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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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 4일] 구한말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11.04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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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발한 항일 항쟁을 펼치다 일제에 의해 체포된 '채응언(1883~1915년11월4일)' 선생이 순국한 날이다. 채 선생이 붙잡힌 이후 20년간 이어진 전국 의병활동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 출생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그의 이름과 출생일은 연대조차 불분명한 편으로 당시 신문에는 ‘채응원(蔡應元), 채응경(蔡應慶)’과 또 다른 자료에서는 ‘채도석(蔡道錫)’ 등의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1915년 체포된 후 재판 판결문에는 ‘채응언’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있고 매일신보 기사에 나이가 32세 또는 33세로 기록돼 있어 그는 1883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함께 판결문에 그의 주소가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고익리로 되어 있고 체포된 지역이 성천군임을 미루어 이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 의병 활동 전개

그의 의병 활동 사항도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체포 직후 보도된 신문에는 ‘조선보병대 군조’ 출신이라는 내용이 있어 ‘육군 보병 부교(副校)’로 알려졌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추측으로는 그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 빈농 출신으로 그와 비슷한 처지의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가혹하게 수탈당하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등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협객 농민’으로 판단된다.

이후 의병 활동에 투시한 시기를 추측하면 판결문 내용으로 1907년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짐작된다. 당시 판결문에는 “재물탈취를 기도하고 이래 이들을 인솔해 총기를 휴대하고 각 지방을 횡행 중” 등의 인용문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그는 1907년 음력 7월경 의병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황해도 출신인 이진룡의 의병대나 경기도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진묵 의병대 또는 서태순, 전병무의 의병대 등에 합류해 의병 운동을 개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채응언의 체포 당시 모습
채응언의 체포 당시 모습

이후 황해도를 중심으로 강원도, 함경남도, 평안남도 등에서 항일 유격전을 펼쳤고 수하에는 400여명의 의병들을 이끌었던 의병대장으로 주로 일본군 헌병부대와 경찰서 등을 습격해 군경을 살해하는 활동을 했다.

그들은 활동이 워낙 민첩했기 때문에 일제는 “은현 출몰이 지극히 교묘해 수비대 및 헌병에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토로한 바 있었으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투입한 비용이 10만원을 상회했다고 한다.

현상금이 걸려 있던 그는 1915년 7월 성천에서 밀고로 인해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었고 격투 끝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체포된 모습이 일본 헌병과 함께 맨발에 수갑을 찬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 최후의 의병장

보도된 기사내용
보도된 기사내용

그는 체포 후 평남 성천에 일시 구금되었다가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다.

그와 함께한 의병 9명에 대한 공판이 8월 28일부터 진행해 평양지방법원에서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재판과정에서 자신들을 의적(義賊)처럼 표현했다. 재판 참관인이 5백명이 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했다. 재판과정에서 살인·강도죄를 적용받는 것에 대해 불복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기도했다. 자신의 옷을 찢어 꼬아 감방 대들보에 목을 매려다가 간수에 발견되어 미수에 그친다.

이후 11월 4일 오후 2시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매일신보 1915년 11월 6일자에는 “나는 의병인즉 강도 살인의 죄명으로 사형을 받기는 싫다하고 상고는 하였으나 사형을 면하지 못할 줄은 짐작한 모양이더라. 감방 중에 있어서도 책을 보는 등 태연하더라”고 보도된다.

 '최후의 의병장'으로 불리는 채응언 선생의 체포 이후 국내 의병 운동은 명맥이 거의 끊겼고 그의 처형으로 1895년 을미사변 때부터 시작된 20여년간의 의병 항쟁 시기가 마감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 독립기념관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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