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 30일] 신분을 극복한 한국인 최초 외과 의사 '박서양'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9월 30일] 신분을 극복한 한국인 최초 외과 의사 '박서양'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9.30 13: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백정 신분으로 한국인 최초의 외과 의사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 대한국민회의 군사령부의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박서양(朴瑞陽 1885년 9월 30일~1940년 12월 15일)’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그의 본명은 봉출, 봉주리로 최초의 의료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2008년 8월 15일 독립운동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고 2010년에는 그의 일생을 모델로 한 SBS 드라마 ‘제중원’과 2013년 5월 31일 KBS 1TV ‘KBS 파노라마’에서 다루었다.

▲ 출생과 유년시절

박서양 (1908년)
박서양 (1908년)

그는 1885년 9월 30일 한성부 장통방 관자동계 관자동에서 백정 박성춘과 그의 부인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 형제로는 형인 박대양과 여동생 박양빈 외에 1명의 여동생이 더 있었고 여동생 박양빈은 신규식의 조카인 의사 신필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1894년 박서양은 무어 선교사가 설립해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고 이때 세례를 받고 기독교(북장로교)로 개종한다.

의료선교사인 에비슨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많은 과정을 거쳐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 허용과 평민들과 같이 갓을 착용하고 9월에는 호적에 오를 수 있게 했다.

1898년 에비슨과 친분이 많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에 도움을 받아 제중원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하게 되고 글공부를 시작해 1900년 8월 제중원 정규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 최초의 외과 의사 및 교수

1908년 6월 제중원 의학교 졸업사진(가운데 오른쪽이 박서양)
1908년 6월 제중원 의학교 졸업사진(가운데 오른쪽 박서양)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한다.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홍석후, 이승만, 김규식, 이교승 등과 함께 ‘황성기독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고 YMCA 학당의 부학감(부교감)을 맡아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윤치오, 유길준 등의 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치고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의학부 학생으로 재학하며 제중원의 의사 조수로 의사의 수술을 보조했다.

당시 그는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3일)의 기사가 나오는데,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씨와 의학생 박서양씨가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1908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에 1회 졸업생이 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된다.

졸업 후 박서양은 기존에 출강하던 중앙학교 외에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치다가1910년 세브란스의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가 되어 강의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됐다.

이후 1913년부터는 외과학 교실의 조교수와 부교수 역임하면서 병원 외과 환자를 진료한다. 한국의 최초로 전문학교(의료)의 교수가 된 것이다.

▲ 독립운동과 교육활동

1904년 에비슨 박사의 외과수술을 보조하는 박서양(원안)
1904년 에비슨 박사의 외과수술을 보조하는 박서양(원안)

그는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龍井)으로 이주해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고 의료활동과 함께 교회를 설립한다.

이어 6월 30일 ‘숭신소학교(崇信小學校)’를 세워 교장이 되고 직접 한 반을 맡아 학생들을 교육하며 교사 5명을 초빙해 반 28명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 신분, 반상의 차별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무료로 가르쳤으며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의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이후 1919년 3월 숭신소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의해 일시 폐교당한 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관을 맡으며 1920년 5월 대한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 정책 전개함에 따라 만주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에도 종군한다.

1921년 숭신소학교를 재정비해 학급을 증설하고 4학급에 남자 25명, 여자 15명의 학생을 추가로 받아들이고 교사 5명을 더 충원해 1923년 첫 졸업생 28명을 배출한다.

1930년 2월 그의 숭신소학교 학생 120여명은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에 호응해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20여명이 체포되어 연행된다.

이후 1932년 6월 윤봉길 의거 사건 직후 그의 학교는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위해 1935년 최종 폐교당한다.

그는 1936년 귀국해 황해도 연안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지만 1940년 지병으로 인해 12월 15일 오전 6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 165번지 자택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200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의 공로로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