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9월 29일] 시인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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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9월 29일] 시인 ‘김영랑’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9.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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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오늘은 시인 김영랑(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이 사망한 날이다. 그의 본명은 김윤식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영랑은 아호로 시문학 작품을 발표하면서 사용했다.

시인 김영랑
시인 김영랑

▲생애 및 활동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사별했으며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그는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휘문의숙에는 홍사용·안석주·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 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열,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이후 향리에서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과 재혼을 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굳은 절개를 보여줬다.

광복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는 등 우익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평소에 국악이나 아악,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다 1950년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48세 나이로 사망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문학작품

1930년부터 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내 마음 아실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발표했다.

김영랑의 초기 시는 박용철의 도움을 받아 펴낸 ‘영랑시집(1935)’에 실려 있는데, 주로 자아의 내면에 바탕을 둔 섬세한 감각을 민요적 율조로 글을 썼다.

이 시기의 시는 '촉기'라는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그의 해석에서 의하면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다. 라고 했다. 이는 육자배기를 비롯한 우리 민요에 흐르고 있는 정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민요적 율조에 절제된 시어를 써서 자연을 노래한 점은 한국시사에서 김소월과 함께 전통시가의 맥을 이어가는 시인으로 인정되는 부분이다.

그의 시에는 슬픔·눈물·기다림·마음 등의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서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마음을 나타낸 것처럼 그의 시의 서정성은 이런 마음에서 비롯됐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쓸쓸한 뫼 앞에’를 비롯한 모란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모란이 떨어져버린 뒤의 절망감을 보여주는 ‘모란이 피기까지는(문학, 1934. 4)’ 등이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다.

1940년을 전후해 발표한 ‘거문고(조광, 1939. 1)’, ‘달맞이(여성, 1939. 4)’, ‘독을 차고(문장, 1939. 7’)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섬세한 감각을 민요적 율조로 초기 시와는 달리 자아를 확대하고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초기에는 형식에 치중한 반면 후기에는 내용에 치중했다.

이 시기 그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절망과 회의를 노래하면서 '죽음'을 강렬하게 의식했다. '죽음'을 초기에 노래했던 비애의식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나타낸 것으로 일제 말기의 어려운 현실을 잘 나타냈다.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기린에 비유한 ‘거문고’와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독을 차고’, ‘묘비명(조광, 1939. 12)’, ‘한줌 흙(조광, 1940. 3)’ 등의 작품에서 운명론을 이어갔다.

끝으로, 김영랑은 해방이후 해방의 감격을 그대로 글로 표현한 ‘바다로 가자’, ‘겨레의 새해’ 등을 발표해 조국의 산천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과 새로운 조국건설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시집으로 ‘영랑시선(1949)’, ‘현대시집(1950)’, ‘모란이 피기까지(1975)’, ‘찬란한 슬픔(1985)’ 등이 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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