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5일]의학과 교육 발전에 힘쓴 ‘윤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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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5일]의학과 교육 발전에 힘쓴 ‘윤일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10.0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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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96년 오늘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초기 의학 교육 및 대학 교육 체제 정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조선 의사협회(현 대한의사협회) 설립과 최초 우리말 학술지 '조선 의보' 창간을 주도한 윤일선이 출생했다.

그는 1963년 한국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 도입되자 원자력 병원의 초대 원장에 특별 임명되어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했고 언론과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MBC 부산문화방송 이사와 민주공화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2대 서울시장이자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사촌 형이 되며 구한 말 육군 기병 중장을 지낸 윤치성과 해방 후 내무부장관, 주불 대사, 제13대 서울시장 등을 지낸 윤치영은 그의 삼촌이 된다.

▲병리학의 선구자

그는 1896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계몽사상가인 아버지 윤치오의 높은 교육열로 프랑스인 신부가 운영하는 소학교에서 불어와 어머니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 배운 외국어 능력은 훗날 그가 국제적 의학자로 활약하는 기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폐렴으로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건강의 중요성을 느껴 의학을 공부하게 된다.

1906년 7월 귀국하여 일출 소학교와 경성중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물리와 화학에 눈을 뜨고 자연계 현상과 법칙 등에 흥미를 느껴 뉴턴ㆍ다윈ㆍ멘델의 이론에 심취했다. 다시 일본으로 유학해서 오카야마에 위치한 제6 고등학교를 거쳐 1923년 교토 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윤일선은 세계적 병리학의 권위자인 후지나미 아키라가 교수로 재임 중인 병리학 교실에 부수로 들어갔다.

후지나미는 사회 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의 저명한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Rudolf Carl Virchow)의 직속 제자로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윤일선은 피르호의 영향을 받아 의학발전에 공헌하고 인류 복지 증진을 의사의 사명감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확립했다. 

1925년 건강 악화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하다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병리학 부수와 조수를 거쳐 1928년 병리학 제1강좌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이듬해 1월엔 교토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해 4월 세브란스의전 병리학 교실 주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윤일선은 기초의학과 연구를 강화한 교육체계를 만들기 위해 일본식 의학 교육을 한국 실정에 맞게 활용했으며 서지학을 학문 연구의 기초라고 생각하고 막대한 금액을 들여 영어ㆍ불어ㆍ독일어로 된 전문 서적과 최신 학술지를 구비하는 등 도서관 재정비에 착수했으며 연구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연구실 제도를 도입하고 동물실험동을 신축했다.

1930년 경성제대 의학부 조수 이갑수와 함께 한국인 의사 단체 ‘조선 의사협회’를 창설하여 우리말로 된 학술지 ‘조선 의보’를 발행하고 초대 편집자를 맡은 윤일선은 첫 한국어 논문을 발표해 의료 대중화에 앞장섰으나 손기정 선수의 혈액검사 결과를 게재했단 이유로 1938년 강제 폐간됐다.

이후 세포병리학을 바탕으로 암ㆍ내분비ㆍ알레르기 연구에 집중하여 한국인에게 발생하는 기생충병인 상피병(象皮病)의 존재와 역학적 유의성을 국내 최초로 밝혀 병리학 연구의 기틀을 정립했고 오늘날까지 병리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국 의학의 세계화

유창한 외국어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본 병리학회지ㆍ일본 미생물학 병리학회지ㆍ조선 의학회지ㆍ중국의학회지ㆍ독일 학회지 등에 논문을 게재하여 국제 학술 교류의 물꼬를 터는 등 식민지 의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 의학의 세계화에 노력했다.

병리학 순례 중에 미국 록펠러 연구소에서 분양받은 발암 실험용 동물 주를 활용하여 토끼 위에 암종을 만드는 데 성공한 윤일선은 1943년 일본 병리학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1944년에 중국 난징에서 열린 동아 의학 대회에 한국 대표 의학자로 참가해서 인체 병리학 연구를 선도했다. 

또한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 암 연구 분야의 최정상급 학술지 ‘Cancer Research’에 논문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 조사 연구’를 발표했고, 이듬해 송요섭과 함께 논문 ‘실험적 간암 형성에 비장이 미치는 영향’을 게재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교육위원회 위원을 맡아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위한 교육체제 정비와 구축에 노력했고 1946년 이제구와 함께 조선 병리학회를 창립하고 15년간 회장직을 맡아 병리학의 탄생과 발전을 주도했으며 1948년에는 조선의학협회 회장에 취임해 ‘대한의학협회’로 개칭했다.

1956년 7월 처음으로 치러진 총장 직선제를 통해 서울대 총장에 취임하여 의학뿐 아니라 대학교육 전반을 책임지고 선진 교육체계 구축에 매진했다. 당시 서울대가 핵심 사업으로 추진한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농대ㆍ공대ㆍ의대 소속 교수 226명이 미국 연수를 떠났다.

교육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원자력 원장(1963년), 한국 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1967년), 한국 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1980년) 등을 역임하며 과학기술 저변 확대에 노력했고 문교부, 보건사회부, 과학기술처, 유네스코 등 각종 위원회 자문을 맡아 사회봉사와 학술 진흥에 일조하는 등 후학들의 연구를 격려하고 학술적 조언을 건넸다.

1987년 6월 22일 세상을 떠난 그는 근대의학을 한국에 도입해서 기초의학의 기틀을 세운 공로로 제1회 대한민국 학술원상(195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1956년), 대한민국 문화훈장(1962년), 3.1 문화상(1963년)을 받았고 2011년 8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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