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24일]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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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9월24일]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9.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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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조동호
유정 조동호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92년 9월 24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었던 유정 조동호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을 지냈으며, 1921년 민간단체 한중호조사에 관여한 인물이다.

한중호조사는 중국 각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의 민간인들 사이에서 한중친선과 한국독립 지원, 반제국주의 활동 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에 관여했다가 일제강점기 말기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주요인물로 활동했다.

해방 정국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근로인민당 등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 논설주필위원을 지냈다.

▲ 어린시절

조명하와 고령 박씨 박빈의 3남 2녀 중 3남인 그는 충청도 청산현 현내면 백운리(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5년 청산에 신명사립학교(현 청산초등학교)가 개교 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3년을 다니다가 큰형 조동석의 권유로 한성부로 상경한다. 

1908년 한성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해 2년을 수료한 후 측량기사가 됐다.  그당시 국립우편학교 출신인 여운형을 우연히 만나 이때부터 둘은 평생의 동지가 된다. 

이후 여운형의 소개로 이만규를 알게 됐으며 이들은 서로 친해지면서 교우를 쌓았다고 한다.

독립운동 투신
 
1912년 조동호는 우연히 신촌에서 일본순사와 실랑이를 벌이다 서대문경찰서에서 구타를 당하고 감금당한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후 중국인 황자오가 경영하는 상하이 구국일보에 입사, 언론계에 입문했고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에 몸담게 됐다. 

1918년에는 여운형, 장덕수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했다. 

이듬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동호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게 됐으며 안창호, 이광수, 차이석 등과 같이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또한 중국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임정요인들인 노백린, 김규식,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이끌었다. 

여운형, 김구, 이유필 등과 창립한 한국노병회에서는 교육부 부원과 회계검사원을 지냈고, 1923년 12월경 귀국했다. 

▲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귀국 후 조동호는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며 논설위원과 특파원 등 언론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1924년 사회주의운동단체인 화요회에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김재봉·김찬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돼 소련에서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을 받아왔다.

독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잡혀 4년간 옥고를 치른 후에는 논산의 갑부 윤희중 등과 상의해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중앙일보를 인수했다.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한 중앙일보는 여운형이 사장, 조동호가 편집고문, 논설위원 주필로 있었다. 

1933년경에는 정태희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려다 또 다시 조선총독부 이동경찰에 검거돼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된다. 

▲ 해방 정국과 낙향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동맹 동지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조동호는 선전부장을 맡았다. 

9월 14일 건준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자, 조동호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위원 겸 내무부장 대리로 선출되는 등 좌익의 핵심축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평생의 동지인 여운형이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 당하자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했다. 

1948년 5월 10일 수원 누이의 집에 일시 체류할 당시 김성숙, 윤동명 등이 그를 방문, 여러번 제헌국회의원에 출마를 권고했지만 사양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을 했을 때 그는 “남북이 이제 원수가 됐으니 우리가 합치려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조동호는 한국 전쟁을 겪고 1954년 9월 11일 오후 1시 추석날,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사망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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