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28일]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열단을 통한 항일무장투쟁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9월28일]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열단을 통한 항일무장투쟁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9.28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98년 오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하고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출생했다.

광복 후 좌ㆍ우익이 심하게 대립할 당시  고문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겪는 것을 계기로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역임했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김원봉[출처=독립기념관]
김원봉[출처=독립기념관]

▲의열단을 통한 항일 무장 투쟁

김원봉은 1898년 밀양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민족주의자 전홍표가 세운 동화 중학에서 공부하다 동화 중학이 폐쇄되자 표충사에 들어가 손자병법, 오자병법 등 중국 병서를 약 1년 동안 공부했다.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때 일본과 전쟁 중이던 독일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해 중국 천진의 덕화 학당에 들어가 독일어를 배웠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 가담하자 덕화 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김두전(약수), 이명건(여성)과 함께 1918년 남경의 금릉(金陵) 대학에 입학하면서 중국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무장력을 갖추었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 1919년 만주의 신흥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 및 폭탄 제조법 등을 수료하면서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해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신흥 무관학교 동료 13명을 설득해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을 가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 격인 의백에 취임하여 조선 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 이른바 칠가살을 암살 대상으로 정했다.

또한 1920년 부산ㆍ밀양경찰서 폭탄 투척(박재혁ㆍ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김익상),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김지섭), 1926년 동양척식 회사 폭탄 투척(나석주) 등 국내 일제의 침략 본거지 파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의열단은 김지섭의 동경 거사 실패와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졌고, 1924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대중 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승하여 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단원의 이탈과 자금 부족으로 의열투쟁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1925년 동아일보를 통해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합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나 사실상 의열단의 무장투쟁은 막을 내린다.

이후 항일 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김원봉은 1926년 황푸 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여 삼민주의를 주창한 설립자 쑨원의 영향으로 중국의 혁명사상과 좌파 계열의 교관과 학생들을 통해 공산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조선의용대 결성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29년 상해에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창설하여 한인 군사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1929년 소련 공산당의 지원으로 '레닌주의' 창간호를 발간했고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안효구(안광천)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을 결성했다.

1932년 11월 혁명 세력의 결집을 목적으로 한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이 결성하자 여기에 참여했고 1935년 신한독립당ㆍ한국독립당ㆍ대한 독립당ㆍ조선혁명당ㆍ의열단 5개 단체를 규합하여 창당한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에 참여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일전선 결성에 나서 조선민족해방 동맹ㆍ조선 혁명자 연맹과 더불어 조선민족전선 연맹을 결성하고, 1938년 10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 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김원봉은 제1 지대장 및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45년 12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해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 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 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 약법 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했다.

1946년 10월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일제강점기 형사 출신의 경찰에게 체포와 고문 등 수모를 겪었으며 이후 여운형의 암살 등 계속되는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

그해 8월 북한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오른 김원봉은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으며 평안북도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에 기여한 공로로 북한이 6.25 전쟁 공훈자에게 수여하는 '노력훈장'을 받았다. 

1952년 5월 노동상에 임명되어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을 관장했으며 이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역임했으나 1958년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면서 숙청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