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9월 15일] 호남 벌판을 의연하게 지킨 의병장 ‘오성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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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9월 15일] 호남 벌판을 의연하게 지킨 의병장 ‘오성술’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9.1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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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오늘은 대한 제국 말기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910년 처형된 오성술(1884년 5월 15일 ~ 1910년 9월 15일)선생의 기일이다. 본명은 오인수, 자는 성술, 호는 죽파이다.

독립운동가 의병장 오성술
독립운동가 의병장 오성술

오성술은 일제 침탈에 맞서 '호남 벌판을 의연하게 지킨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어릴 적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공무원의 신념, 지식인의 자세, 매국대신 처단을 요구 등 의병항쟁을 주창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최익현 선생을 존경하며 선생의 강론에 참석했다. 이에 최익현 선생의 강론이 끝났을 때 오성술은 의병부대를 만드는 의사를 밝혔다. 최익현 선생은 어린 그를 매우 대견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 민계 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 말했다.

오성술은 1884년 5월 15일 전라남도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과 나주 임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였고 지역 인사들의 추천으로 1905년 7월, 21세의 나이에 종9품 충의참봉을 제수 받았다.

그는 1907년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해 거병 했으며, 의병장 김태원이 합진을 제의해 와 두 진영을 합치기로 결의했다. 1907년 9월 기삼연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편성된 호남 의병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도 참여했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 격화하자 일본 군경은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의병장들과 독립 운동가들은 총살되거나 체포됐고 특히 의병부대에 대한 대우는 가장 잔인했다. 수많은 의병영웅들을 공개 처형하였고 길거리에 목을 걸어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1908년 1월에 일본군 수비대 지휘관 요시다를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2월 기삼연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에서 총살되었고, 4월에는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성술은 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과 더불어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의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했다.

이때부터, 오성술은 전략을 바꿔 친일파의 처단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당시 친일 밀정들이 의병부대의 작전계획 및 위치를 일본군에 알려줘서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오성술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1908년 1월 10일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농장 지배인 사이토의 집을 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했다. 1908년 12월 나주에서 밀정 황도현의 재산을 탈취하고 그를 살해도 했다.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지주 모리의 집을 습격해 2,500원 상당의 물품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1909년 8월 영산포 헌병대 요시무라 중위가 이끌던 ‘폭도토벌대’의 추격을 받다가 교전 끝에 결국 체포되어,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대구감옥에서 향년 26세로 교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당시 오성술은 16세에 금성 나씨와 결혼해 26세에 얻은 1명의 석 달된 아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가 오성술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했다.

*출처: 위키 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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