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 9일] 임시정부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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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9월 9일] 임시정부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9.0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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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비서장으로 활동한 '동암 차리석(1881년 7월 27일~1945년 9월 9일)’선생이 순국한 날이다.

차 선생은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근무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제의 탄압으로 임정에 위기가 오자 그는 국새와 중요서류 등을 가지고 항저우로 피신 한 후 그곳에서 임정의 각료들을 다시 불러 모아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등 ‘임시정부의 버팀목’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쓰촨성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고 환국 준비를 하던 중 과로로 9월 5일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9월 9일 환국 직전 순국했다.

1948년 9월 선생의 유해는 국내로 돌아와 현재 효창공원에 애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고 정부로 부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과 1995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출생

동암 '차리석' 선생

1881년 7월 27일 평안남도 선천군에서 아버지 차시헌(車始軒)과 어머니 서시은(徐始恩)의 4남 2녀중 셋째아들로 출생했으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0년 평양 숭실학교 정규중등과정 5년제에 입학 후 1904년 제1회로 졸업했다.

▲ 항일투쟁

1908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쓰며, 도산과 양기탁이 주도한 ‘신민회 평양지회’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11년 일제 초대 총독 데라우치 암살 모의사건인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일제로부터 8년을 언도 받아 3년을 복역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1919년 상해로 망명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와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국무의원 (뒷줄 맨 오른쪽이 동암 선생)

1932년 이동녕, 안창호,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고 실무간부로 활동하면서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이념 전파에 전념했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활약한다.

1935년 내부 분열로 와해되는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설득해 임정의 명맥을 유지시키고 11월 임시정부 비서장에 선출된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에서 국무의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맡아 광복군의 대일항전 지원과 광복군의 독립성과 자주성 유지에 기여한다.

1944년 4월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장에 재선되어 활동하다 1945년 8월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고 환국 준비에 힘쓰던 중 과로로 9월 5일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다.

아쉽게도 그는 9월 9일 환국 직전 순국했다. 그는 ”광복이 되었는데 왜 귀국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느냐“며 병상에서 애통해 했다고 한다.

▲ 효창공원 안장

효창공원 '차리석' 선생 묘역

1948년 9월 백범 김구는 차리석 선생과 이동녕 선생의 유해를 모셔와 사회장 장례식과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백범은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은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추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고 1995년 9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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