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9월 8일] 국민회군 사령관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 9월 8일] 국민회군 사령관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9.08 1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오늘은 독립운동가 안무(1883년 음력 6월 29일 ~ 1924년 양력 9월 8일)장군이 사망한 날이다. 그의 본명은 안병호, 아호는 청전이다.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항일운동

안무는 함경북도 경성의 무인 집안 출신으로 1899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에 입대해 경성교련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 교련관이 됐다

중국과 접하는 함북 무산 등 국경 지대에서 육군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련관으로 근무했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함북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계기로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국민회군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국민회군 400여 명을 편성·무장시키고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해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군 출신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아 독립군 양성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독립군 무장에 힘을 기울여 국민회군 전력을 증강시켰다.

▲봉오동 전투

1920년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하고 사령관 최진동의 부관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봉오동전투에 참가해 독립군을 추격해온 일본 제19사단의 1개 대대를 궤멸시켰다. 봉오동전투 패전을 계기로 일본군이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간도로 침략해오자, 12월에 밀산으로 이동했다.

1921년 2월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 국민회군을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합류시켰다. 같은 해 6월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이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자, 이청천 등과 만주로 돌아갔다.

▲항일무장투쟁 중 총상

그는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국민회군 대표로 참석해 6월에 국민위원으로 선임됐다.

1924년 용정으로 돌아와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1924년 9월 6일 오후 3시, 3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유격전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던 그는 연길현 모아산 북쪽 산기슭에서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는 중상을 입고 용정의 자혜병원에 입원되었으나 일본에 의해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치료받기를 거부하다가 사망했다. 향년 41세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그의 유해는 용정 일본영사관 지하실에 6일간 보관되었다가 용정 시내 영국덕이에 묻혔다. 이는 한인들의 유혈폭동을 우려한 일제 경찰의 조치였다. 안무의 순국소식에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간도의 한인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안무가 김좌진, 홍범도와 달리 부각되지 못한 것은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2인자였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1920년대 간도 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립군을 이끌고 일관성 있게 무장투쟁을 벌인 항일운동가”라고 평가했다. 

2009년 대한민국 법무부는 중국에 살던 안무의 후손을 대한민국에 영구 귀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무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80년 안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1994년 9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됐다.

2020년 청산리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함께 싸운 홍범도함 김좌진함의 해군함정 이름에 이어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을 재조명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2020년 11월 진수된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의 2번함을 '안무'함으로 명명하였다.

*출처: 위키 백과 / 나무 위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