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7일]조선 YWCA 창설의 기초 다진 '유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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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9월7일]조선 YWCA 창설의 기초 다진 '유각경'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9.0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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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66년 오늘 김필례ㆍ김활란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청년회 연합회(YWCA)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유각경’이 사망했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었지만, 애국 금차회, 조선 임전 보국단 등에서 활동할 때 수많은 강연과 좌담회에서 일제의 전시체제와 황민화 정책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동원과 징병제 실시를 독려, 홍보하는 글을 기고하여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성 계몽운동

그녀는 1892년 6월 14일 서울에서 도쿄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물산 장려회 이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 그리고 중추원 참의와 충청남도ㆍ강원 도지사를 지낸 유성준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개화파의 거두이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그녀의 큰아버지이고 유만겸, 유억겸에는 사촌 누이가 된다.

1910년 정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여 선교회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유학해 베이징 협화 여자전문학교 보육과를 다니다 1914년에 귀국해 정신 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22년 김필례ㆍ김활란 등과 함께 YWCA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당시 YWCA 사무실이 있던 서울 종로구의 태화 여자관에 유치원을 개설하여 아동교육에 힘썼다.

1924년 상해에 있는 트레이닝 코스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 YWCA의 전국적인 조직 확대에 기여했으며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되자 김활란과 함께 간사로 참여했다. 그러나 여성의 특수한 문제는 신간회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4월 여성의 독자적 조직체의 단체명을 근우회로 제안하고 창립 준비 위원으로 참가했고 같은 해 5월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된 이후 선전 조직부원, 감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근우회의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월간 종합잡지 청춘과 여성 기관지인 근우에 여성의 지위 향상과 사회 진출에 관한 기고를 했고 1929년 근우회가 해체되자 본연의 YWCA 운동에만 전력해 1932년부터 1936년까지 YWCA 회장과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 여자 기독교 절제회 회장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

1937년 대한 예수교장로회 여전도 회장을 맡아 여자 기독교 절제회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전쟁 협력을 위한 국방비 헌납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 어용단체인 애국 금차회의 발기인 및 간사로 참여했다.

또한 1938년 ‘시국과 여성의 각오’란 주제로 열린 여성 단체 연합 시국강연회와 1939년 8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주관 국민정신 선양 전국 순회 강연 등에 참여해 수많은 강연과 좌담회에서 일제의 전시체제와 황민화 정책을 옹호하고 여성들의 동원을 독려했다. 1941년 10월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친일단체인 조선 임전 보국단 부인대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며 군수 자재 헌납 운동과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광복 직후 좌우 연합 여성 단체인 건국 부녀 동맹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으나 사회주의 진영과의 의견 차이로 곧 탈퇴했고 기독교 계통 여성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우익 여성 단체인 한국 애국 부인단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8년 정부 수립 후 여러 여성 단체와 정부, 정당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장로교 여성계를 대표하여 이승만을 측면 지원했는데 남북협상론과 단정 수립론이 나타났을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으며 1950년 5월 사회부 부녀국 국장과 1953년 감찰위원회 위원과 대한 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1966년 사망했다.

 

*출처: 다음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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