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31일]민족대표 33인 대표해 독립선언문 낭독한 '이종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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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31일]민족대표 33인 대표해 독립선언문 낭독한 '이종일'선생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8.31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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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 3만5천장 인쇄...전국 배포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25년 오늘 3ㆍ1 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인쇄ㆍ배포하고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선언서를 낭독한 이종일이 사망했다.

그는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개화 운동에 투신하여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했고 교육을 개화의 방법으로 중요시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조선 국문 연구회 회장으로 한글 맞춤법 연구에도 공헌했다.

▲순수 한글 신문 창간 

1858년 11월 6일 충청남도 태안군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872년에 상경하여 이듬해 과거에 급제했다. 1882년 8월 수신사 박영효의 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선진 문물을 견문하고 커다란 자극을 받는다. 

이후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 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고 그해 11월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민족의식 진작과 민족 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898년 3월에는 개화사상의 대중 기반인 대한제국 민력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898년 이승만 등이 창간한 경선 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신문 사업을 실학과 개화 운동의 추진 수단으로 전개해 하층민과 여성들도 볼 수 있는 순 한글의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여성을 국가 발전에 유용한 잠재적 자원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계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글 사용의 일반화로 민족 언어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해 임명된 중추원 의관을 10개월 만에 사퇴하고 유능한 인재 양성을 위해 ‘애국단’을 조직했으며 11월에 민영환, 정교 등과 사립 흥화 학교를 1902년 2월에 김가진, 지석영과 국문 학교를 설립했다. 1905년에는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의무교육 실시와 교육 기회 평등을 강조했다.

이후 1910년까지 ‘제국신문’의 사장 겸 기자로서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 민보’ 등에도 참여하여 언론계에서 개화와 구국 계몽에 앞장섰으며 ‘제국신문’이 폐간된 후에는 ‘천도 교회 월보’, ‘자강 회보’, ‘대한 협회보’ 등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그의 사상을 펴 나갔다.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다 

1898년부터 손병희와 시국담을 나누며 동학사상에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던 그는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 과장과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을 역임하며 천도 교단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고 천도교의 역사를 정리한 ‘본교 역사’ 출간과 ‘동경대전’을 번역했다.

1907년 9월부터 2년여 동안 정 3품인 학부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문 연구에서도 탁월한 견해를 제시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작위 수여 제의를 거절하고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나서 천도 교도들을 중심으로 3ㆍ1 운동의 모태가 된 비밀결사조직인 민족문화 수호 운동 본부와 천도 구국단을 조직, 본부를 보성사에 두고 총재를 손병희로 추대하고 자신은 회장 및 단장에 취임했다.

1894년의 ‘갑오 동학 농민운동’과 1904년의 ‘갑진 개화 신생활운동’을 갑인년인 1914년에 재현한 독립을 위한 민중운동인 ‘삼갑 운동’을 계획했고, 1919년 3ㆍ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장효근ㆍ김홍규ㆍ신영구 등과 함께 당시 최신식 인쇄 기술을 갖추고 있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3만 5,000장을 극비리에 인쇄해 인종식 간사를 통해 전국에 배포했다.

또한, 당초 독립선언서는 이종일이 작성할 계획이었으나, 평소 과격한 언사로 인해 과격파로 인식된 그를 대신하여 최남선이 작성했고 이승훈을 통한 기독교 대표들과의 연결 고리를 주선하여 민족대표 중에서도 주범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 복역 이후 가출옥했다. 

1922년 3월 1일 다시 천도교 단독으로 제2의 3ㆍ1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이후 조선 국문 연구회 회장으로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는 한편 3년간 ‘한국 독립 비사’를 집필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압수됐다.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에서 영양실조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네이버캐스트 /국가 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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