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 5일]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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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 5일]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호머 헐버트’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8.0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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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목사로 대한제국에서 항일운동가로 활동하고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호머 베절릴 헐버트(1863년 1월 26일~1949년 8월 5일)’박사가 서거한 날이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 허흘법, 할보, 허할보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최측근으로 보필역할 및 자문역을 하며 미국과 서방 국가들과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다.

또, 고종황제의 특사를 세 번 맡으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단 파견 및 활동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서양에 널리 알리고 한국의 문화를 자주 소개하는 저서를 지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고 2014년에는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초기 생애

'호머 헐버트' 박사
'호머 헐버트' 박사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미국 버몬트 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다.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메리 우드워드’로 그녀의 아버지는 인도에 파송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가 1884년,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그해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을 했다.

1886년(고종 23년) 길모어, 벙커 등과 함께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고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 귀국해 아내 ‘메이 한나’와 결혼 후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 한국문화 연구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1891년 최초의 순한글 지리사회 총서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고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며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했다. 조선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자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해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에서 빛나는 업적이라고 칭송했다.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 알파벳보다 우수하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한국의 금속활자, 거북선 등에 대한 한국 문화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 독립운동 지원 

그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역할 및 자문역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내며 1904년에는 AP통신의 객원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해 송고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미국 대통령 면담을 시도, 실패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같은 해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발간해 한국 역사와 문화 전반을 소개했다.

1906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고종에게 건의하고 1907년 7월 자신이 밀사보다 먼저가 '회의시보'에 대표단의 호소문을 소개하고 한일합병의 부당성과 일본의 만행을 폭로 후 미국으로 간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해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고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한다.

1944년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을 펼쳤다.

▲ 외국인 최초 건국공로훈장 태극장 추서

양화진 '헐버트 박사의 묘'
양화진 '헐버트 박사의 묘'

1949년 42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의 초청으로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한한 그는 1주일 후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해 8월 11일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현재 그의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이곳에 잠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후,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고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언론인)과 함께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힌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2014년 10월 9일에는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저서로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2권)’, ‘대동기년(大東紀年, 5권)’,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고 ‘대한제국 멸망사’는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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