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27일] 미술 운동의 리더... ‘이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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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27일] 미술 운동의 리더... ‘이봉상’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7.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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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16년 오늘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작품을 소개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생소한 화가가 되었지만,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평론가ㆍ교육자 등으로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이봉상이 출생했다.

그의 호는 석정(石鼎)으로 1936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한 이후 자연과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어 향토성이 강한 색채에 기하학적 구성을 결합한 작품을 그렸으며, ‘도자기와 어항’(1955), ‘고궁에서’(1958), 그리고 ‘나무’(1962년) 등의 대표작이 있다.

▲미술 운동의 리더

서울 종로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이봉상은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29년 조선 미술 전람회(선전)에 응모하여 유화 작품 ‘풍경’을 입선시키면서 13세에 최연소 등단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후 제9회부터 14회까지 6회 연속으로 선전에 입선하고 1936년에는 작품 ‘폐적’으로 특선을 받았고, 1932년과 1935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 조선 남녀 학생작품전’에서 최고상과 1936년 일본의 ‘문부성 전람회’에서 입선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광복 이전의 그의 작품은 한국전쟁 와중에 모두 망실되어 원작은 단 한점도 전해지지 않으나 다행스럽게 선전도록이나 신문 등에 실린 흑백 도판들이 존재하여 미약하게나마 당시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40년 1년간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미술 단체인 ‘단광회’에 참여했고 관제 전시회인 결전 미술전에 ‘진격’, ‘짧은 휴식’ 등의 작품을 출품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됐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직후 ‘미술 문화협회’ 창립과 1950년 1월 ‘50년 미술협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51년에는 국방부 종군 화가단으로 활동하다 1952년 이중섭 등과 함께 피난지인 부산에서 ‘기조전(其潮展)’을 열었고, 이후 ‘창작 미협(創作美協)’, ‘신상회(新象會)’, ‘구상회(具象會)’ 등의 창립에 가담하여 미술 운동의 리더로서 활약했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전임강사로 활동하면서 미술 교과서 편찬과 비평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특히 젊은 화가들을 위해 운영한 앙가주망 작업실에서 박서보, 김창열, 김종학, 이만익, 윤명로 등의 걸출한 화가를 배출한 교육가였다.

그는 초기에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인상파적 작품을 남겼고, 1950년대 이후에는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대담한 붓질과 색채로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1960년대에는 주로 나무와 수풀ㆍ산과 새ㆍ달 등의 소재에 한국적인 설화성을 가미한 주제를 즐겨 다루었으며, 화면도 중후한 마티에르와 더불어 양식화된 구상 세계를 보여 구상계열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봉상은 제3회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지병인 만성 신장염이 악화하여 1970년 8월 4일 사망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동료들이 그해 11월 이상봉의 작품 60여 점을 모아 유작전을 열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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