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16일]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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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16일]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7.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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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19년 7월 16일은 대한민국 제10대 최규하 대통령이 태어난 날이다.

1945년부터 경성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 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된 뒤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로 가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7일부터 1979년 12월 6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6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군부 실권하의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재직 초반부터 하나회가 반란을 일으켜 군부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 시위가 터지는 등 내홍을 겪었다.

▲ 출생과 젊은 시절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836-2에서 최양오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이후 서울로 상경해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해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2월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했다.

해방 직전 경성사범대학 영문과 조교수로 재직하다 1946년 4월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에 투신한다.

▲ 공직자로서의 행보

1947년 그는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을 지냈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농림부로 보직돼 양정과장으로 승진 후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4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농림부차관 정흥구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 의해 발탁됐다.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이 된 최규하는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된 후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귀국 이후 1967년에 외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1967년 제22차 유엔 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 장관 재임 시절에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 행정 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 외교를 강화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 총리 임명과 실권 없는 대통령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 되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된 후,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하나회의 정치군인들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면서 국방부 고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붙잡아 감금시키고 군부를 장악한 뒤,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4월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다.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1980년 7월 30일 신군부의 부탁을 받은 김정렬이 청와대로 찾아가 5시간 담판을 하고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 퇴임 이후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취임식을 가지면서 최규하 내외가 초청됐는데 그의 부인 홍기 여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최규하는 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는가 하면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87년 6·29선언 이후 12.12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에 출석, 증언하라는 야당과 국민여론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이때에도 그는 법정 증언을 거부하고 입을 다물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7-5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오전 7시 37분 향년 87세로 서거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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