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 15일] 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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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 15일] 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7.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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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일제 강점기 상해여자청년동맹과 임시의정원,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남편 엄항섭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많은 활동을 한 여성독립운동가 ‘연미당(1908년 7월 15일~1981년 1월 1일)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그녀는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에서 아버지 연병환과 어머니 김정숙의 1남 1녀 중에 맏딸로 출생해 1938년 임시정부가 창사로 옮겼을 때부터 본명(연충효)보다 아명인 '연미당'으로 활동했다.

▲ 생애

그녀는 12세 때인 1920년 초,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해 인성학교를 졸업하고 진강해관으로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하이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정착하고 다음해인 1927년 3월20일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과 결혼한다.

1932년 4월29일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를 탈출해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했다.

광복 후인 1946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됐을 때 남편 엄항섭이 납북되자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을 이어왔다.

말년에는 중풍을 앓으며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독립운동 활동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모습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모습

그녀는 1930년대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0년 8월, 상하이 한국여자구락부가 상해여자청년동맹으로 재편시 참여했고 1931년 7월 출범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 단체 대표로 활동했다.

이후 독립운동계의 공동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했다. 각 신문사에 배일전문을 보내 중국내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한인의 입장을 설명했고 동연합회 명의의 의연금을 모금한다.

1930년대 초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서도 남편(엄항섭)과 함께 참여해 단장 김구를 적극 지원한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 또한 펼쳤다.

같은 해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어 매년 8·29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펼쳤다.

그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가 일어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으로 피신해 위중한 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한다.

1936년부터 그녀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을 했고 재건 한국독립당이 새로 출범했을 때도 여성 당원으로 활약한다.

이후 1938년 10월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대원이 되어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선전 홍보활동과 연극, 무용공연 등 위문 활동을 이어간다.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명이 함께해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할 때 조직부 주임으로 복무하며 충칭방송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과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방송을 한다.

또, 일본군 소속의 한국 국적의 사병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한국말로 알려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을 유도했다.

이와 함께, 충칭 투차오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에 방문해 한인 포로 위문과 한국가요를 불러 그들의 향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공연을 펼쳤다.

그녀가 1943년 5월 10일에 있었던 한국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에서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해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한다.

가족관계와 상훈

가족사진(1945년)
가족사진(1945년)

연미당 선생은 남편 엄항섭 선생과 결혼해 슬하에 2남3녀,  5남매를 둔다. 기선(1929년), 기동(1931년), 기남(1938년), 기란(1943년),  기원(1944년)을 낳았다.

6·25전쟁 후 부군 엄항섭이 자진 월북했다는 오해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납북 과정에서 본인 의사에 반해 납북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정부로 부터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연미당 선생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맏딸인 엄기선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199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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