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20일]최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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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20일]최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7.2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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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32년 오늘 비디오 아트를 개척한 현대 예술가 ‘백남준’선생이 출생했다.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했다.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공로로 금세기 최고의 실험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그는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1997년 독일 ‘카피탈’지가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 대부분은 현재 부품조차 구할 수 없는 브라운관 TV로 구성되어 있어 작품 보존 문제로 미술계가 고심하고 있는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다다익선’(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과 대전시립미술관에 전시된 ‘프랙털 거북선’은 모니터 노화로 가동을 중단했다. 

▲플럭서스 운동

백남준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파 재벌인 백낙승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을 접하며 자란 그는 수송초등학교와 경기 보통 중학교때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 모두 일본으로 이주하여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을 전공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와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 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1956년 졸업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헨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미술과 음악을 공부했다.

1958년 현대 전위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를 만나 깊은 영감을 받은 그는 1959년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공연 중에 피아노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 작품으로 요제프 보이스와 인연을 맺어 평생의 예술적 동지가 되었다.

그는 1960년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에서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내는 등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고, 1961년 일종의 급진적 미술 운동으로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예술과 일상적 삶의 접목을 지향점으로 삼은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조지 마키나우스,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주도했다.

그는 이런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얼마 후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고 공언하고 영상예술로 전향하여 1963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에서 13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시대를 앞서다

1965년 비디오 캠코더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그 영상을 ‘카페 어 고고’에서 공개 방영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치며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부터는 퍼포먼스보다 비디오 작업에 주력하여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 비디오 아트와 자연물을 음악적으로 혼합한 테크놀로지적인 작품을 선보여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한 비디오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1977년 최초의 위성방송 공연인 ‘도큐먼트(Document)’에 이어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기념하기 위한 ‘바이 바이 키플링’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손에 손잡고’라는 인공위성 쇼를 발표하여 비디오 예술의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199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을 발휘해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에서 '레이저 아트'를 선보여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개척했다.

백남준은 1997년 뚜렷한 창조적 성과를 이룬 비독일인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고, 1998년 현대 예술과 비디오를 접목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교토상을 받았다. 또한 1999년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과 2000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2006년 1월 29일 사망했으며, 유해는 서울 · 뉴욕 · 독일에 나누어 안장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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