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 8일] 국악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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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 8일] 국악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7.0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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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창극 배우로 활동하며 국악 판소리 명창으로 일생을 함께해 온 ‘박동진(朴東鎭,1916년 7월12일∼2003년 7월 8일)’ 선생이 타계한 날이다.

판소리 완창의 대가로 손꼽히는 그는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판소리 분야의 대표적 인사로 활약 해오다 2003년 7월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아호(雅號)는 인당(忍堂)이다.

▲ 생애와 활동

충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현, 충남 공주시 무릉동)에서 출생한 박동진 선생은 16세 때 공주에 들어 온 협률사의 공연을 본 이후로 판소리에 빠지기 시작해 18세 때 청양에 거주하던 손병두 문하에 들어가 처음 판소리를 익혔다.

이후 그는 김창진(金昌鎭) 문하로 옮겨 ‘심청가’를 배우고 19세 때에는 정정렬(丁貞烈)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하지만, 당시 정정렬 선생의 제자들이 많아 다 배우지 못하고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조학진 문하에서 ‘적벽가’를, 박지홍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다.

그 후 다시 상경해 정정렬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웠다고 한다.

1944년에서 1952년까지 8년간은 조선음악단과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창극단 생활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섰다.

1958년에서 1959년까지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잠시 지내고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로 활동한다.

1968년 국립국악원 원장 성경린의 주선으로 한일섭과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를 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박 선생은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과 ‘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한다.

그 외에도 1970년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 등을 복원해 완창 발표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 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며,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박동진 선생은 1969년 장로교 목사 조향록과 극작가 주태익의 요청으로 창작 판소리 ‘예수전’ 공연을 계기로 개신교에 귀의했고 이후에도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개신교 선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과 다음해 ‘성서 판소리’를 미국에서 발표했다. 그후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임명과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활동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2003년 7월 8일 88세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다음날인 7월 9일 생전에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고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변녹수(재혼)와 슬하에 4남의 자녀를 두었다.

현재 충남 공주시에 ‘박동진판소리 전수관’이 운영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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