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2일] 한국 최초 가톨릭 추기경 ‘김수환 신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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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2일] 한국 최초 가톨릭 추기경 ‘김수환 신부’ 탄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7.0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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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22년 7월 2일은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이며, 한국 최초의 가톨릭 추기경인 김수환 신부가 태어난 날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앙을 실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다.

생전에 그는 로마교구의 '산 펠리체 다 칸탈리체 첸토첼레 성당' 명예주임사제직의 사제급 추기경이었다.

▲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출생

그는 경상북도 군위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김익현은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년 무진박해로 관군에게 잡혀 순교한 인물이다.

부친을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김영석은 1895년경 군위에 정착하고 그해 그곳에서 서중하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이후 김수환을 포함한 형제들이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그가 8살 때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의 어릴 적 꿈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하고서 25살이 되면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사랑의 영향으로 그는 넷째형 김동한과 함께 사제의 길을 결심하게 된다.

▲ 사제 서품과 추기경이 되기까지

김수환은 일제강점기 일본 조치대학에 유학하고, 해방 후에는 성신대학을 거쳐 1950년 서품을 받았다.

그가 사제로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안동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에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김천 성당의 주임 겸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60년에 제2공화국 출범 소식을 접했고 이듬해 1961년 다시 박정희 등에 의한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고 그는 군인들의 쿠데타에 반대한다.

1966년 2월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마산교구에 발판을 마련했다.

2년 후인 1968년에는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 안정된 행정을 수행했다.

1969년 3월 28일 로마 교황청은 김수환을 동아시아인으로서는 세 번째 추기경에 임명한다.

▲ 공동선 사상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고,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적 권익으로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

또한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쓰였다.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대중에게 천주교회가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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