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29일] ‘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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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29일] ‘만해 한용운‘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6.2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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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44년 오늘 3ㆍ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 참여해 독립선언을 이끌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친 승려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1918년 불교 잡지 ‘유심’을 창간하여 계몽적 성격의 글을 발표했고 1925년에는 한국 근대 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내어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는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시와 소설을 써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의 집에서 사망했다.

한용운 [출처=독립기념관]
한용운 [출처=독립기념관]

▲불교 혁신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그는 유년 시절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서상기와 통감을 독파했으며 이 시절 아버지로부터 의인과 결사의 기개와 언행 그리고 국내외 정세를 설명 듣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때마침 홍성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과 청ㆍ일 전쟁을 목격하면서 집을 떠나 한양으로 가던 중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설악산 백담사에서 주지인 김연곡 스님을 은사로 맞아 불문에 귀의했다.

그는 그곳에서 불교 경전은 물론 그 외 여러 서적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지리서인 ‘영환지략’과 계몽 서적인 ‘음빙실문집’을 보고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몇 나라밖에 몰랐던 그에게 다른 대륙 등 이렇게 넓은 세계와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넓은 세계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금강경과 목탁 그리고 영환지략의 지도를 담은 걸망 하나를 들고 세계 여행길에 올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으나 일진회원으로 오인한 교포 청년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동포 간의 반목과 살육에 크게 낙담하여 귀국했다. 

1908년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 등지를 순회하였는데, 이때 조동종의 종무원을 찾아가 히로쓰 세쓰조(弘眞雪三)의 호의로 학비 없이 조동종계 구택 대학(駒澤大學)에서 일본어와 불교 그리고 서양 철학을 배웠다. 

그해 10월 귀국하여 범어사와 지리산 일대 사찰을 돌며 불교의 대중화와 개혁 운동에 노력했다.  1910년 10월 원종의 대종정 이회광이 일본의 조동종과 한국 불교의 통합을 꾀하는 조동종 맹약을 체결한 사실을 알게 된 한용운은 이회광의 소행이 한국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는 매종(賣宗) 행위라고 규정하고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을 발표한 그는 스님들이 절에서 지내며 불경만 외는 것은 구세(救世)를 외면하는 것으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다른 종교와 경쟁하고 구걸을 금지하고 예불 격식도 하루 한 번으로 간소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한 후 영남ㆍ호남 지방의 사찰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었다.

▲3・1 독립선언

1917년 교양서인 ‘정선강의 채근담’을 간행하고 계몽 잡지인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그가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와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해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키워갔다.

1919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는 등 독립에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최린ㆍ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뜻을 세우고 3ㆍ1 운동을 주도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원칙에 따라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지나치게 온건하다며 그는 마지막 공약 3장에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구절을 삽입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민족대표 33인이 체포될 것을 알고 ①변호사 ②사식 ③보석을 거부할 것 등의 투쟁 3대 원칙을 제시했고 중앙학림의 학생이었던 백성욱, 김법린 등에게 ‘독립선언문’ 3천 장을 주어 여러 절에 배포하게 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당부했다.

그해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ㆍ제출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통해 제국주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이해와 민족의 독립 근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제시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ㆍ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형식으로 출옥한 후 불교의 사회화를 위하여 법보회를 발기하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저항시인

그는 1926년 한국 근대 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행했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써 형상화한 것이다. 

1927년 좌우합작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중앙 집행위원과 경성 지회장을 겸직했으며 1930년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 승려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에 ‘불교’ 지를 인수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했고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 연구회를 조직했다.

1936년 신채호의 묘비 건립과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백 년 기념회를 개최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 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70년에 탑골 공원에 ‘용운당 대선사 비’와 1981년에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또한, 1985년에 충청남도 홍성군에 만해 한용운 선생 동상이 세워졌고 2003년에는 백담사 입구에 백담사 만해 마을을 개관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 위키 /만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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