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6월 23일] 만주의 호랑이 '독립운동가 김동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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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6월 23일] 만주의 호랑이 '독립운동가 김동삼’선생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6.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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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김동삼(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독립 운동가로 본관은 의성, 아명은 김긍식이며, 아호는 일송이다. 김동삼은 만주지방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다. 오늘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근대 교육과 계몽운동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나 의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그는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고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웠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1909년 계몽 운동에 뛰어든 그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김동삼 역시 양기탁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무장투쟁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으로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 됐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 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독립 선언 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상하이에 자리잡은 그는 1922년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했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 후 대한독립군 준장으로 전역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는 그의 옥중 유언인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유골은 유언에 따라 한강에 뿌려졌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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