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22일]‘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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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22일]‘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6.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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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09년 오늘(음력 5월 5일)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해군 초대 참모총장과 제5대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한 손병일이 출생했다.

그는 한국 전쟁 시기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서울 수복 작전에 참전했으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해군병 학교(현 해군사관학교), 대한민국 해병대 등을 창설했으며, 전사 편찬실과 해군 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조직체계 개선에도 노력한 그는 한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해군의 발전에 큰 공적과 영향을 남겼다.

 ▲한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은 평안남도 강서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1921년 만주로 건너가 원광중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 진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군함과 상선을 보고 진로를 바꾼 그는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를 졸업 후 독일 상선 하벤 슈타인, 화객선 람세스, 중국 초상국 소유 여객 화물선에서 약 4년 6개월의 승선 생활을 하면서 항해술 습득은 물론 국제적인 안목을 넓히고 세계의 문물을 습득했다.

1934년 휴가차 귀국한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상하이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다시 중국으로 떠났고, 무역회사인 동화 양행에서 근무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1945년에 조국 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그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해사대의 조직을 결의했다. 그해 8월 23일 해사대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그 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 당국과의 협의 끝에 해안경비를 담당할 해방병단을 창설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한국 해군의 전신이며 모체가 되었다.

1946년 6월에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어 해안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었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자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해군참모총장 재직 시 인재양성에 깊은 관심을 가져 1946년 1월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 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생도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해군 창설 초기 1척의 군함도 보유하지 못했으나 미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1948년까지 총 37척의 군함(비 전투함)을 인수하였고, 이후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함정 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결성하여 12만 달러를 모금하여 총 4척의 전투함을 구매했다.

이때 구매한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한국전쟁 초기 도입 후 3개월 만에 부산 해상에서 특수부대 600여 명을 태우고 침투하던 1,000톤급 북한 해군 무장수송선을 격침해 한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해상 전투 승전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영흥도와 덕적도, 두 섬의 탈환으로 인천 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고 서울 수복 작전에서는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전쟁의 상흔에 고통받는 서울 시민들에게 큰 희망을 선물했다.

손원일은 전쟁 중에도 해군력 증강을 위해 호위함을 추가로 인수하는 한편, 군종 제도의 도입, 전사 편찬실과 해군 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의 사기 진작과 현대화된 군 조직체계를 만들며 내일을 준비했다.

1953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그해 8월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그는 능숙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막대한 군원을 획득함으로써 국방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면에 있어서도 국립묘지(지금의 현충원) 창설, 군목제도의 활성화, 전시 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공헌했다.

그 후 서독 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했는데 특히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각종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퇴임 후 재향군인회 자문위원회 위원장(1966), 한국 홍보 협회장(1972), 제7대 한국 반공연맹 이사장(1972), 대한 석탄공사 이사장(1976) 등을 지냈다.

국방ㆍ외교ㆍ사회 등 각 방면에서 공헌한 그는 평소 지병인 신장병으로 1980년 2월 15일 사망하여 국립 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상훈으로는 태극 무공훈장, 자유 훈장, 미국 공로 훈장 등을 수상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대한민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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