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15일]‘국제태권도연맹' 창립한 '최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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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15일]‘국제태권도연맹' 창립한 '최홍희'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6.1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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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용어 처음 사용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대립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2002년 오늘 1955년 당수도, 공수도, 권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전통 격투기를 하나로 묶어 '태권도'란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태권도의 발전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홍희가 사망했다.

대한태권도협회와 국제 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해 총재로 활동한 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대립하여 북한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전파했으며 2000년대에는 WTF와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태권도 9단(사성) 소유자인 그는 2002년 평양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그는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의 산골 마을에서 5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재학하면서 가라테를 배웠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당해 평양 제30 보병사단에서 근무하던 중 ‘평양 학병 의거’로 일본군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육군 창설 멤버 110명 중 한 명이 되었고 이후 미국 상급 군사훈련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1953년 제주도에서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부대 이름을 '태권도 부대'라 명명하고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군대 도장인 ‘오도관’을 설립, 이곳 사범들과 논의해오던 무술을 더 개량해 1950년대 ITF 태권도의 원형을 만들었다. 1955년 ‘태권도’라는 명칭이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만장일치 통과했으며 이듬해 학생 태권도연맹을 조직했다.

1959년 3월 월남과 대만에 역사상 처음으로 국군 태권도 시범단을 인솔하여 파견했고 제6군단장 재임 때는 군단사령부에도 태권도를 보급하다 1962년에 예편하여 말레이시아 초대 한국대사로 부임했다. 1966년 3월 9개국의 참여한 국제 태권도연맹(ITF)을 서울에서 창립했으며 1년 후에는 참여국은 40여 개국으로 늘어난다.

국제 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와의 관계가 악화하고 박정희 정권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던 최홍희는 결국 해외 출국이 통제되자 1972년 3월 신변 안전과 유신독재에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캐나다로 망명을 떠나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한다.

1974년 7월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여한 제1회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했으며 북미권의 마샬 아츠 붐을 이용해 엄청난 조직 성장을 이뤄 태권도라는 이름이 서방권 국가들에 알려지는 데 공헌했다.

이후 사범단을 이끌고 동유럽에 태권도를 보급했고, 1980년대 들어선 실제로 태권도 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으로 가서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1986년 북한 시범단을 구성해 중국을 방문,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한 이후 공산권 국가에도 활발히 진출했다.

그의 저서로는 ‘태권도 백과사전 15권’(1985)과 ‘태권도와 나’를 발간했으며 2002년 6월 평양에서 사망, 애국렬사릉에 안장됐다. ITF의 후계자를 당시 IOC 위원이던 장웅을 지명하여 ITF 내의 북한계 세력이 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국제태권도연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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