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 6월 7일]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받은 독립운동가 '박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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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 6월 7일]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받은 독립운동가 '박시창'
  • 장석호 기자
  • 승인 2021.06.0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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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기자] 1986년 오늘 별세한 독립운동가 박시창(朴始昌)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창설에 기여했고 이후 육군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광복회장도 역임했다.

생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의 양자이며 그의 생부 박해겸(朴海謙)은 양부 박은식의 6촌 동생이다.

그는 일찍이 대한독립군에 투신해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했다.

8·15 조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도 참여해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 예하 연대장·국방부 병무담당관·육군본부 정훈참모부장·육군 제3사단장 직무대리·육군 제8사단장 등을 거쳐 육군 제1군단 부군단장을 두루 역임하다가 1959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1976년 제5회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고 1986년 6월 7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시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의 장남 박유철 또한 지난날 광복회 회장을 지냈었다.

독립운동

박시창은 1923년경 남경 중앙대학에 수학하다가 휴학했다. 그 원인은 학비 등 생활고 때문으로 보인다.

남경에서 상해로 돌아온 그는 조선인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해지역의 청년 회원 117명을 보유한 동맹회의 목적은 혁명적 정신을 고취하고 단합적 행동을 훈련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26년경 그는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했다.

이곳에 수학하던 그는 1926년 7월 중국의 제1차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참전하게 됐다.

1926년 10월 중국 국민혁명군이 무한(武漢)에 입성하고 이곳에 북벌군의 초급 간부 확충을 목적으로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때 무한은 한국인 장교와 각처에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한국 학생들 다수가 이 무한분교에 입교하는 동시에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7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운 의열단과도 관계를 맺고 활동는데 후일 의열단이 주축이 되었던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참여한 계기가 됐다. 

1919년 창설된 의열단은 1926년 이후 단의 주력이 혁명의 성지였던 광동성 광주(廣州)로 집결, 이곳에서 의열단은 한인 운동자들과 황포군교 입교생들 가운데 다수의 신입자를 충원함으로써 조직세가 크게 신장됐다.

이때 박시창은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다녔던 진공목, 진갑수, 안재환, 김영재, 송욱동, 장기준, 그리고 중국군 기술교관으로 있었던 백득림, 홍의균, 권준, 전창무, 노세방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하게 된다.

혁명청년회는 안으로는 동지들에 대한 훈련에 치중하는 한편 밖으로는 독립운동의 선전사업을 펼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조직이 점점 확장되어 후에 의열단 무창지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박시창은 1928년 남경의 군관단 입대를 거쳐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에서 8년 동안 복무했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87사단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제87사단은 1932년의 상해사변에 투입되었던 정예부대였다.

이때 그는 육군 대위의 계급으로 중국군 제5군 제87사단 예하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1935년, 그는 김구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최중호의 딸 최윤신과 결혼했고, 계속 중국군에서 복무를 했으며 1937년 노구교 사변 당시 중국군 포병연대장으로 보정에 주둔하고 있기도 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을 때,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역시 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 장교로 활동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됐다.

또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와 문일민을 광복군 참모부 참모로 임명했고, 그는 그해 12월까지 참모로 재직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인터넷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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