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 3일]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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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 3일]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6.0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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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장 약산 김원봉과 평생 동지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의열단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尹世胄, 1900년 6월 24일~1942년 6월 3일) 선생’이 전사한 날이다.

경남 밀양출신인 그는 선배 약산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친하게 지냈으며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선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민족의식과 3.1운동

'석정 윤세주' 선생
'석정 윤세주' 선생

1900년 6월 24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석정 선생은  같은 마을에서 두살 위의 약산 김원봉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가 된다.

1910년 일본에 나라가 강점되는 경술국치를 맞자 그는 김원봉과 함께 일본어 시간이 있는 날은 학교에 가지를 않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에 학교에서 일장기를 나누어주면 화장실에 넣어 버리는 등 어릴 때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나타냈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그는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장 ‘전홍표 선생’은 제자들에게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언제나 슬프고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한때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그는 김원봉과 함께 역무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개천절 기념행사에 시위를 벌였다.

그는 1919년 경성부에서 3·1운동 시위 참가 후 밀양으로 돌아와 ‘밀양시장 만세운동’을 은사인 전홍표 선생과 함께 전개했다.

D데이를 3월 13일 밀양 장날로 정하고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몰래 빼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매를 인쇄하고 숨겨놓고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 수천명 군중 앞에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사건으로 윤치형 등과 함께 궐석재판을 받아 ‘밀양 만세운동’ 관련자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중국으로 도피했다.

▲ 의열단 조직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후 군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는다. 이때 동향 선배 약산 김원봉과 재회했다. 그는 약산과 함께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반성하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의열단’을 조직한다.

1919년 12월 하순 김원봉, 이종암, 곽재기, 이성우 등이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폭탄과 탄피제조기, 약품 등을 입수한 의열단은 국내로 들어가 암살, 파괴대상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국내에서 폭탄을 받아서 보관할 사람은 당시 밀양청년회 회장인 김병환이였고 상해로 간 동지들은 폭탄과 권총 탄환을 더 입수해 같은 방법으로 국내로 들여왔다.

이 무렵 석정 선생은 1920년 6월 6일 경성 인사동 중국음식점 2층에서 의열단 단원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기득, 한봉근 등과 함께 회의 중 일제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게 체포됐다.

그 후 7년 간의 투옥 생활을 하고 1927년 2월 7일 출옥해 고향으로 돌아가 중외일보 기자와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내며 일경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다 1927년 8월 ‘난창 폭동’에 다시 가담한다.

난창 폭동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해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지만 이때의 사건으로 의열단은 와해 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 동북지방에서 무장 투쟁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남경에서 의열단 옛 동지들을 재회하고 1932년 10월 개설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 교관이 된다.

그는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어 국내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무장단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때 그는 조국의 민족해방전쟁으로 발전시켜고자 청년 당원 10여명을 이끌고 상해로 건너가 중국의 민중과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 간에 공동행동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중국편의대, 의용군 본부, 중국의 각 항일신문사 등과 연계하며 한중합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여론을 조성했다.

그는 1938년 군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북 지방으로 북상해 화북지대 ‘조선의용대’ 간부로 일했다.

1942년 5월 일본은 제36사, 제41사 주력 3만여명을 동원해 중국 공산당의 태항산 근거지를 공격하자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의 소탕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한다.

하지만 6월 2일 일본은 병력 1000여명과 비행기 2대를 동원, 팔로군 전방총사령부가 있는 마전 일대를 포위공격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조선의용군은 고지를 점령하고 ‘팔로군’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비전투 정치 간부와 가족들은 태항산 뒤편으로 퇴각했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그는 전사했다.

한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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