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 8일]조선 후기 두 번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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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 8일]조선 후기 두 번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 김씨’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6.0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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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1789년 오늘(음력 5월 15일) 조선 후기 헌종과 철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두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했고 그 결과 안동 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한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출생했다.

그녀가 지은 33통의 편지로 구성된 ‘순원왕후 어필 봉서’는 가문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 등을 나타냈다. 우아한 궁체(宮體)로 쓴 이 편지는 19세기 한글 편지의 특징과 언어, 서체 이해에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됐다. 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ㆍ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이다. 

​순원왕후어필봉서​
​순원왕후어필봉서​

▲안동 김씨 세력

순원왕후 김 씨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서인 노론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조를 옹립하려다 죽임을 당한 노론 4 대신 중 하나인 김창집의 후손 김조순이었고, 어머니는 청송 심씨 집안사람이다.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품행이 오롯하고 영명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여계’와 ‘내훈’ 등 여러 서적에 달통했다. 1800년 순조보다 한 살 많은 12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초간택ㆍ재간택을 거쳤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순조 2)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본관 경주)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으며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

그러나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순조가 아닌 안동 김씨 세력으로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 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 왕후를 배출했다. 효현ㆍ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순원 왕후의 아버지 김조근은 김조순과 7 촌간이고 김문근과는 8 촌간이었다.

본래 조정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는 이조와 병조에서 세 명의 인재를 추천하고 국왕의 낙점을 받는 삼망제가 행해졌는데 안동 김씨는 세 명의 예비후보를 모두 자파의 인물로 채움으로써 국왕의 인사권을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등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관직은 모두 안동 김씨, 혹은 그들을 추종하는 인물들이 차지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1809년(순조 9년) 순원왕후는 원자를 낳았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원자를 낳은 것은 현종비 명성왕후 김 씨가 1661년(현종 2년)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 만의 경사였다. 그는 바로 ‘조선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린 효명세자 이영으로 순조는 크게 기뻐하며 태어난 당일에 ‘원자(元子)’로 삼았다.

그 뒤로 순원왕후는 요절한 왕자 1명과 명온공주ㆍ복온공주ㆍ덕온공주 등 3명의 공주를 더 낳았으며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21세의 나이로 급서하고, 1834년(순조 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면서 순원왕후는 정치 일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리청정

1834년(순조 34년) 헌종이 8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궁중의 제일 어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 참여를 부담스럽게 여긴 순원왕후는 일곱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을 거절했으나 여러 외척 가문의 정치적 경쟁 구도에 떠밀려 결국 수렴청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으로 여인들이 정치 경험이 없었으므로 인척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수렴청정은 필연적으로 외척들의 득세를 가져왔다. 순원왕후 역시 가문의 뜻에 따라 헌종의 왕비로 인척인 김조근의 딸을 간택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더욱더 강고하게 만들었다.

1849년(헌종 14년) 6월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은언군의 손자인 19세 이원범(항렬 상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을 전격적으로 보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는 일자무식이었으므로 순원왕후는 또다시 수렴청정에 나섰다. 

순원왕후는 제왕 수업이 되어 있지 않은 철종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철종비를 간택할 때는 노론이나 소론을 가리지 말고 다른 가문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했지만 안동 김씨의 뜻에 따라 1851년(철종 2년)에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간택했다. 그로 인해 철인왕후 김 씨가 중전이 되면서 안동 김씨는 순조ㆍ헌종ㆍ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다.

현재 규장각에는 ‘순원왕후 어필 봉서’를 포함한 58점의 한글 편지가 전해지며 그 외 사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한글 편지가 다수로 알려져 있다. 대략 1840년부터 1850년대 중반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편지에는 당대의 정치에 대한 관심사와 궁중 생활의 이면사는 물론 친정인 안동 김씨에 대한 애틋한 소감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순원왕후 김 씨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던 1857년(철종 8년) 승하하여 1900년(광무 4년) 순조가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순원숙황후로 추존되었고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 13의 1에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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