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5월 27일]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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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5월 27일]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5.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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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과 결혼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일제 강점기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동래지부, 신간회 동래지회 등에서 활약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약산 김원봉 선생과 결혼해 의열단과 남경조선부인회, 조선의용단 등에서 여성과 민족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박차정(1910년 5월 7일~ 1944년 5월 27일)’ 선생이 타계한 날이다.

▲ 가족관계

'박차정 선생'
'박차정 선생'

박차정 선생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부산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후 탁지부주사를 역임 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개해 1918년 1월 자결한다.

어머니는 동래군 기장면 출신으로 일찍이 김원봉(金元鳳) 선생과 의형제를 맺었던 약수 김두전과는 육촌 사이였고 김두봉과는 사촌의 사이였다.

항일운동 시작

박차정 선생은 15세 때부터 ‘조선소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고 1925년 일신여학교 입학해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했다.

1929년 일신여학교 졸업 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부장·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해 12월에는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1930년 1월 부산방직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 됐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중국에서 독립투쟁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박차정 선생' 동상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박차정 선생' 동상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그녀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선생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한다.

1932년에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임명되어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했다.

이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 주임과 1936년 7월 이성실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고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한다.

1937년 11월에는 의열단 한중민족연합전선의 대 일본 라디오 선전방송을 맡아 활동했다.

1938년 의열단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촉구하고 이후 10월부터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1939년 2월 장쑤성 쿤룬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27일 사망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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