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5월 19일] 한국 한의학자 '김일훈' 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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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5월 19일] 한국 한의학자 '김일훈' 선생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5.1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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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1992년 오늘은 김일훈(1909년 음력 3월 25일 - 1992년 양력 5월 19일)선생이 사망한 날이다. 그는 한국의 한의학자, 독립운동가 이었으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 약초 연구가였다. 성리학 노론 화서학파의 법통을 계승했으며. 호는 인산이다.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 한의학자로서 죽염 과 유황오리 의 최초 발명자이다. 유황과 다슬기의 효능을 연구했고, 홍화씨의 근골 강화 약성을 발견해 보급시켰다.

개발품으로 항암치료제 오핵단과 사리장을 개발했다. 목에 좋은 무엿과 폐에 좋은 호두기름 제조법을 개발해 보급했다.

▲생애

인산 김일훈은 1909년(융희 3년) 음력 3월 25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흥리의 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성리학 유학자였던 아버지의 뜻에 의해 화서학파의 스승을 찾아가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그가 무료 진료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어려서 비 개인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서 부터였다.

▲ 독립운동

인산은 1925년 17세에 조선인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본인 학생들 폭행으로 체포를 피하고자 만주로 피신했으며 이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 의병장인 변창호의 모아산 부대원으로 항일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부로 송환되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러나 이후 감옥을 탈옥한 뒤 광복 직전까지 전국의 산지를 돌며 약초 연구에 몰입했다. 또한 김일훈은 백두산, 묘향산 등지에서 20여 년 동안 생활하면서 자연물의 약리작용을 간파하고자, 러시아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 약초 연구

이때 김일훈은 전국 곳곳에서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가 없이 살려내는 ‘신의(神醫)’로 불리었다. 해방 후에는 정치활동으로는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의 측근의 한 사람이자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52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경상남도 함양군으로 내려가 약초 연구와 진료 활동, 강연 활동에 전념했다.

타계하기 전까지 돈 받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여 '가난한 민초들의 의왕'으로 존경받았다.

이외에도 민간 죽염의 제조기술을 개발해 확산시켰으며, 유황과 다슬기의 효능을 연구해 다슬기의 색이 인간의 간의 색과 유사하여 간에 좋은 점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유황오리를 요리로 개발하기도 했다. 최후 최대의 발명품으로 ‘사리장’을 제조해 항암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사후

김일훈은 말년에 원고 집필과 강연 활동, 조선일보 등 언론사 초청 좌담회 등에 출연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저택 신약당에서 기거했으며, 1992년 5월 19일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968-2, 함양아파트 자택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4세였다. 함양읍 죽림리 농장 뒤편 산에 안장되었다. 2009년 삼남 김윤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 주최로 탄신 100주년 기념 ‘함양학학술대회-함양근현대 9인의 학문세계’를 함양군청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저서

주요 저서로는 우주와 신약(광제원, 1980), 구세신방(광제원, 1990), 신약본초(광제원, 1992) 등의 의서와, 의론과 시사담론을 수록한 어록집 신의(인산출판사, 1996) 등을 남겼으며, 서예작품도 몇 점 남겼다,

*출처: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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