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5월25일]독립운동의 거인... ‘몽양 여윤형‘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5월25일]독립운동의 거인... ‘몽양 여윤형‘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5.25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86년 오늘(음력 4월 22일)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의 불씨를 지핀 항일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출생했다.

1936년 그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있을 때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우승 기사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뒤 보도한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하여 그는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1937년 11월에 신문사는 자진 폐간했다.

1944년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여 광복에 대비했고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에 전념했으나 좌우 양쪽으로부터 소외되어 1947년 7월 19일 우익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 2005년에야 비로소 건국 훈장을 받았다.

1935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여운형[출처=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35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여운형[출처=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조선의 거인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몽양(夢陽)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대대로 벼슬을 누리던 부잣집 양반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했고, 흥화학교를 거쳐 통신원 부설 우무 학당에서 전신 기술을 배웠다.

1907년 기독교 학교인 광동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의 계몽에 힘쓴 그는 부친 탈상 후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 모아 노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는 또 1910년 강릉에 초당 의숙을 세워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장으로 우리나라 최초 해외 원정 경기인 일본 원정에서 신문물을 목격했던 그는 신흥 무관학교를 비롯한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며 조국 광복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간다.

1918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서병호ㆍ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 청년당을 조직했고 장덕수와 함께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상해 영어신문 사장 밀러드에게 전달했다.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 파견대표로 결정하고 이와 함께 조소앙, 김철, 장덕수, 이광수 등 신한 청년당원들을 국내와 일본으로 보내고 여운형 자신은 간도와 시베리아 방면을 순회하며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 파견 사실과 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의견을 알리자 이 소식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은 ‘2.8 독립선언’을 발표했고 국내에서는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상해 교민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포 자제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조선 건국준비위원회와 암살

그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장덕수, 최근우, 신상완 등과 함께 적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하라 다카시 수상 등 일본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해 일본의 위협과 자치제 제안을 공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창했다. 그는 제국 호텔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 피압박민족대회에서 김규식, 김원경, 김단야와 함께 대회 운영 의장단에 선출되어 개회식에서 연설했고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국민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다. 또한 마오쩌둥(毛澤東)과도 여러 차례 만났다.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출감 후 조선 총독으로부터 농촌진흥 운동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고 이후 중앙일보 사장과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일본 패망을 예상한 그는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해 독립을 준비했고 비밀리에 농민동맹도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엔도오 류우사쿠 정무 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위임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그해 12월 조선 인민당을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6년 조선공산당ㆍ조선 인민당ㆍ남조선 신민당 3당 합당 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고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남조선노동당과 합동을 제의했으나 실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한 후 5월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 결국 1947년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1945년 11월 우익 성향의 한 단체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최다 득표를 받았으며 1946년 초 미국과 소련이 좌우합작 위원회를 통해 조선 민주주의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하면서 양국은 그 통일 정부의 수반으로 여운형을 염두에 둘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은 민족지도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