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5월 12일] 구한말 순국열사 ‘이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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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5월 12일] 구한말 순국열사 ‘이한응’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5.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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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1905년 오늘 타계한 대한제국 외교관 이한응(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은 순국열사이다. 본관은 전의, 자는 경천, 호는 국은이다.

경기 용인 군수였던 이경호의 아들인 그는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아버지 이경호가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던 도중 황토현 전투에서 전사한 뒤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됐다.

순국열사 이한응
순국열사 이한응

▲ 외교관 활동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공사 민영돈과 함께 부임했다. 1903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됐다,

1904년 1월 13일 이한응은 영국 대외사무소(Foreign Office)를 방문해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쪽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극동정세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영국 정부에게 극동지역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망했다.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 주도록 요청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 공사들에게 연락해 재외한국공관이 공동으로 노력해 주권 수호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에서의 지도·감독·보호를 인정하는 새로운 영일동맹(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 조약이 동양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냉담했고 오히려 일본과 비밀리에 연락해 그를 축출하려 했다.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예상대로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5월 12일 이한응은 영국 런던에서 음독자살로 순국했다.

이한응의 자결은 국권 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계기가 됐다.

당시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고 장충단 배향 및 내부협판에 추증됐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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