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19일]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리빙스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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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19일]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리빙스턴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3.19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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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빙스턴
데이비드 리빙스턴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13년 3월 19일은 스코틀랜드 조합교회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태어난 날이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를 꿈꾸던 그는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에 파송됐다.

이듬해인 1841년 6월 남아프리카 베추아날랜드에 도착, 니그로 부락에 정주하면서 복음을 전도하고 원주민의 문화를 연구했다.

탐험 행적을 보면 1846~56년 제1회 탐험을 시작으로 칼라하리 사막 횡단, 1849년 느가미호, 1851년 잠베지강, 1855년 빅토리아 폭포 발견 및 아프리카 횡단 달성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베일에 싸여 있던 아프리카의 자연과 사람들의 실체를 탐험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 출생과 어린 시절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빙스턴의 가정은 두세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 왔다. 아버지 니일은 차를 파는 행상으로 일했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에 의해 교회 선교회나 런던 선교회등의 선교회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소년 리빙스턴도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고 있었으며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는 독학으로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했으나, 아편 전쟁때문에 중국에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됐다.

▲ 아프리카에서의 활동

이후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 머무르면서 복음 전도 미 원주민 문화의 연구 등을 시작했다.

선교를 겸해 칼라하리 사막 등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 때의 기록을 토대로 <전도 여행기>를 발표한다.

1858년 리빙스턴은 켈리마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영국 대사가 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됐다.

1866년에는 왕립지리학회의 의뢰를 받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므웨르 호와 뱅웰루 호 등을 발견한 후, 탕가니카 호반 우지지에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 계속되는 탐험과 죽음

죽음의 문턱에서 같은 해 11월, 리빙스턴은 스탠리 수색 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탕가니카 호 북부의 지역을 여행하고, 1872년 3월 스탠리와 작별, 탐험을 계속했다.

1873년 5월 1일 극도의 쇠약과 질병, 특히 이질이 원인이 되어 뱅웰루 호반에서 사망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리빙스턴을 미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장기를 모두 꺼냈고, 이를 무푼두 나무아래에 고이 모셨다.

시신은 방부처리를 하고 햇빛에 보름동안 건조, 미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약 2000Km의 거리를 이동해 지금의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까지 운구했다.

잠비아의 두 청년 추마와 수시의 보호 하에 무사히 시신이 옮겨진 후, 장례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 인종차별 논란

리빙스턴 최후의 탐험 기록은 <중앙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리빙스턴의 최후일지 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 2권(1874)>로 출판됐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그를 ‘암흑 대륙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소개한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프리카에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해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선교사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는 게 리빙스턴의 목적이었으며, 실제로 그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됐다.

더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할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유럽인들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받는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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