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12일] 한국의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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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12일] 한국의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 탄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3.12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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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동상[사진=박열의사 기념관]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02년 3월 12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박열이 태어난 날이다.

3.1운동 이후 일본에 건너간 그는 이듬해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 직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같은 해 10월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된다.

1945년까지 22년간 투옥 후 출소,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해방 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해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지내다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 어린 시절과 아나키즘 활동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상주시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로 진학했다.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했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게 된 박열은 이후 의열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흑도회라는 아나키즘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도 활동하게 된다.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 불령사의 황태자 암살기도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때 증발한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는 장덕수를 잡아다 구타하기도 했다.

같은 해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1923년 10월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됐다.

불령사가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한편 1924년 4월2일 이뤄진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제8회 신문조서 내용을 보면, "피고(박열)는 의열단에 가입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의열단과 관계는 있다"고 답한 부분이 기록돼 있다.

22년의 투옥생활 끝에 그는 일본 패망을 계기로 풀려났다.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와는 옥중 결혼식을 올렸고,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 문경에 안장돼 있다.

▲ 해방 후의 활동

해방 후 박열은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김구가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됐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2월~6월 김구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그 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박열은 1948년 재정 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 납북과 오늘날의 평가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지내다가 한독당 탈당 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다.

북에서 박열의 구체적인 활동 자료는 알 수 없다. 다만 1974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하지만 이 단체는 대남선전과 통일전략에 납북 인사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들을 대부분 비자발적으로 동원했던 단체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납북인사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져왔으나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93년 8월, 박열이 재학한 바 있는 경성제일고보, 경성제이고보에서도 명예 졸업장이 주어졌다.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도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2012년 10월 9일에 개관했다. 정부는 2018년 11월 가네코 후미코에게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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