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3월 10일] 애국지사 ‘장인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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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3월 10일] 애국지사 ‘장인환’ 출생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3.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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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오늘은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의 스티븐스 망언에 격분해 거사한 독립운동가 장인환(1876년 3월 10일 - 1930년 5월 22일)선생 출생일이다.

독립운동가 장인환
독립운동가 장인환

▲ 미국으로 이주하기 까지

장인환은 평남 평양부 대동강면 선교리에서 부친 장명구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으로 6세 때 모친이 사망했고, 16세 때 부친이 사망해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887년 공립학교에 입학해 다녔지만 189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해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잡화장사를 시작하였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했다.

이로인해 1905년 하와이로 이민하게 되었으며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했다.

▲ 독립운동 투신

1907년 3월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의 단결과 민지의 계발을 목적으로 장경 등이 만든 ‘대동보국회’에 가입한 그는 1908년 3월 20일 대한제국 외부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1908.3.21)’라고 친일성명을 발표하자 스티븐스를 처형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려고 워싱턴DC로 가기 위해 오클란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도착한 스티븐스를 저격해 사살했다. 독립운동가 ‘전명운’과 함께한 거사이다.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저격하고, “스티븐스는 일본의 보호정치를 도와주었다. 이런 매국노를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조국 대한의 영광이 될 것이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1908.3.23)라고 선언했다.

거사 즉시 그는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지만, 한인교포의 재판후원회와 변호인들이 장인환의 거사는 애국행위이므로 무죄를 주장해 2급 살인죄로 25년 금고형 판결을 받았다.

장인환은 재판정에서 동지들에게 “조국해방과 자유의 민주대한을 건설하기 바란다.”고 최후 진술하고, 샌퀸틴 형무소에서 10년간 복역했다.

1919년 1월 가석방된 후 법적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수가 없었으나 대한인국민회 사업에는 적극 참여했다.

1922년에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당선되었으며 1923년에는 대의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생계를 위해 10년간 감옥생활에서 배운 재봉업과 세탁업 등으로 생활을 영위해 1924년 4월 10일 완전 석방되었다.

이후 고국에서의 사회사업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선천에 ‘대동고아원’을 후원 했다.

국립현충원 장인환 묘소
국립현충원 장인환 묘소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27년 4월 일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까지 하였으나, 일본 감시에 못 이겨 혼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고, 대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자, 5월 22일 창문을 열고 투신자살했다.

사망이후 미주 한인사회는 최대의 성의를 담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유해는 5월 26일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프러스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975년 국내로 유해를 봉환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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