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18일] 동학 창시자 '최제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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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18일] 동학 창시자 '최제우'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12.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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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동상
              최제우 동상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은 구한말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태어난 날이다.

조선 경상도 월성에서 태어난 그는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최진립의 큰 형 최진흥이 최제우의 7대조가 되며 경주 최부자 집안과는 친족관계에 있었다.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 삼교, 서학, 무속, 정감록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1860년 음력 4월 5일 일종의 신비체험을 한 그는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 하나의 민중운동으로 발전시켰다.

▲ 생애 초기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부친인 근암 최옥과 재가한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서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최제우는 일찍부터 경사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 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0세에 모친을 잃은 그는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씨와 혼인했으며, 4년 뒤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복술 등 잡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구도와 동학 창시

젊은 시절의 그는 서세동점과 삼정문란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1856년 여름 천성산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 닦기로 이어졌다.

1859년 10월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에서 계속 수련을 했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최제우는 ‘천사문답’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동학을 창시하게 된다.

당시 그는 하늘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했고,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됐다.

▲ 포교활동의 시작

당시 조선의 상황은 삼정의 문란 및 천재지변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해 톈진조약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1861년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자 곧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됐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면서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았다.

또한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했고 최제우는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그는 남원의 은적암 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해 논학문·안심가·교훈가·도수사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며 교세가 크게 확장됐는데, 1862년 9월 사술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에 체포됐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며 무죄방면된다.

▲ 동학의 확장세와 만년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는 계기가 됐다.

최제우는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했다.

그 해 12월 각지에 접을 두고 접주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게 된다.

같은 해 7월 제자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으며,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됐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돼 심문을 받다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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