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2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실상 최초 증언 ‘김학순 할머니’ 타계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 12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실상 최초 증언 ‘김학순 할머니’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12.16 0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김학순(1924년 10월 20일 ~ 1997년 12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로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여의고 1939년 17세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중국 각가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녀는 1991년 8월 14일 대한민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의 증언으로 국내 피해자와 더불어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이어졌으며, 이에 따라 2012년 12월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에서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됐다. 이후 2018년 대한민국은 그녀가 첫 증언을 했던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했다.

▲ 어린시절

김학순은 1924년 만주 지린에서 태어나, 부모와 평양에 거주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등쌀에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녀가 태어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적 모친과 교회를 다녔으며 11살 무렵까지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14세 되던 해 그녀의 모친 재혼으로 그녀는 모친과 사이가 멀어지고 이에 그녀나이 15세 되던 때 김학순 모친은 40원을 받고 그녀를 평양에 있는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게 된다.

이에 김학순은 기생 되어 춤,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 기생 수업을 마치고 영업을 하려 했지만 나이가 17세에 불과해 허가를 받지 못했다.

▲ '위안부' 생활

1939년 김학순은 그녀의 양언니와 함께 평양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을 갔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김학순과 양언니는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갔으며, 그날 일본군 장교가 김학순을 강간했다. 다음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언니도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곳에 조선말을 하는 여성들이 더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빨간 벽돌집에서 김학순을 비롯한 5명의 조선 여성들은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보통 오후에 몰려왔으며, 많은 날에는 하루에도 7~8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2달 정도 철벽진에 머무른 뒤 그들은 일본군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군인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술을 마시고 오는 군인들이 많아 사는 게 더 비참했다. 김학순은 양언니(에미코)와 함께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살폈다. 그러던 중 어찌된 일인지 4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을 찾았을 때 김학순은 그에게 사정을 해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 간지 4달 만에 빠져나온 것이다. 이후 김학순은 탈출을 도운 평양 출신의 조선인 상인의 아내가 되어 딸과 아들을 낳고, 한동안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생활했다.

일본군 위안부 증언 기자회견
일본군 위안부 증언 기자회견

▲ 증언

김학순은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마지막 의지의 대상이던 아들마저 초등학교 4학년 때 익사하자, 서울 종로구의 한 판잣집에 세 들어 온갖 일을 하며 생활했다.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해 폭로할 것을 결심했다.

1년 후 그녀는 1991년 8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한민국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고 일본의 우에무라 다카시가 증언의 내용을 기사 보도 했다.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증언 집에서 참담했던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대한민국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항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했으며,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 문제로 확대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녀는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으며,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1천 700여만 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보태달라고”하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증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자신이 당했던 나라 뺏긴 민족의 아픔을 개인적인 한으로 남겨두지 않고 역사적 교훈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여인'이라고 추모하며, 충남 천안시 국립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출처: 위키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