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27일]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 '이소룡'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1월27일]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 '이소룡'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11.2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소룡
                  이소룡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40년 11월 27일은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로 남은 이소룡(브루스 리)이 태어난 날이다.

이소룡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藩)으로, 이소룡(李小龍)이란 예명은 누이동생이, 브루스 리(Bruce Lee)라는 영어명은 출생 당시 미국인 간호사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1958년까지 23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자연스레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그는 후일 당대의 고수 엽문과 그 제자들에게 영춘권을 사사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이소룡의 뛰어난 쿵푸 실력은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용쟁호투’ ‘정무문’ 등 수많은 영화에서 액션 스타로 활약한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그의 아들 브랜든 리 역시 배우로 이름을 날리다 요절하면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배우이기도 하다.

▲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다

1959년에 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쿵푸를 배우면서 싸움과 말썽이 더 잦아지자, 그의 부모는 시민권이 상실되기 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아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소룡은 1961년에 워싱턴 대학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쿵푸 교습이 본격적인 직업으로 발전한 것도 이때쯤 이었다.

이소룡은 전통적인 쿵푸가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기 위해 여러 다른 무술을 비교 검토한 다음 장점만을 골라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1963년 처음 쿵푸 도장을 차린 그는 이듬해에 대학을 중퇴한다. 1964년에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 초청된 이소룡은 유명한 ‘1인치 펀치’를 비롯해 자신이 개발한 신기술을 선보여 관심을 모은다.

곧이어 그는 린다 에머리와 결혼했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브랜든(1965~1993)과 딸 섀넌(1969년생)이 태어난다.

▲ 독자적인 무술세계 구축

1967년 이소룡은 LA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도장을 열었으며, 이때부터 영화배우들과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는다.

ABC 액션 드라마 ‘롱스트리트’에서 이소룡은 무술을 가르치는 중국인 골동품 상인으로 잠시 출연한 후, 홍콩에서 러브콜을 받고 귀국한다.

이전까지의 쿵푸 영화에 비해 훨씬 사실적인 액션 장면이 돋보인 이소룡의 첫 주연작 ‘당산대형’은 이전까지의 기록을 깨트리며 홍콩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주연작인 ‘정무문’은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중요한 소재로 삼아 더욱 화제가 됐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호쾌한 액션뿐 아니라 트레이드마크가 된 울음소리 같은 기합, 복잡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 그리고 쌍절곤 액션을 처음 선보였다.

이소룡의 입지가 확고해지면서 할리우드도 쿵푸 영화의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됐으나, 그는 할리우드와의 최초 합작 영화 ‘용쟁호투’ 촬영 후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다.

▲ 의문투성이 죽음

1973년 7월 20일 밤, 사인에 관한 구구한 추측을 남긴 채 이소룡은 갑작스럽게 향년 3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석연찮은 까닭은 관계자들의 은폐 시도 때문이다. 그는 자택이 아니라 내연녀라는 의혹을 산 여배우 베티 팅 페이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당황한 베티는 우선 영화사 대표 레이몬드 쵸를 불렀고, 30~40분이 지나 도착한 레이몬드는 비밀 보장을 위해 베티의 주치의를 데려왔다 소용이 없자 비로소 구급차를 불렀던 것이다.

사건 이후에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심지어 유족들까지도 계속해서 말을 바꾸는 통에 의혹은 커져만 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삼합회 같은 폭력 조직과 싸우다 죽었다는 설, 가라테를 폄하한 것에 분노한 일본인 무술가들이 죽였다는 설 등 다양한 음모론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소룡의 사망은 그 직전에 앓았던 뇌 관련 질환과 연관이 있으며, 사망 당일에 복용한 진통제 에콰제직에 대한 과민반응이 직접적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 아들 브랜든 리의 비극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가 된 브랜든 리는 1987년 홍콩 영화 용재강호로 데뷔했다.

어렸을 적 홍콩에서 자랐고, 8살 때 이소룡이 사망하면서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와 에머슨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뉴욕 및 LA에서 스트라스버그 아카데미에서 배우 공부를 마치고 액션 배우로 활동했다.

1986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이래 여러 편의 액션 영화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그는 아버지의 사망 20주기인 1993년에 유작 ‘크로우’ 촬영 현장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주로 무술인 역할만 맡다가 처음으로 배우로서의 자신을 보여줄 기회였지만 안타깝게 사망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