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5월 13일] 필리핀 국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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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5월 13일] 필리핀 국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5.1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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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아폴리나리오 마비니(1864년 7월 23일 ~ 1903년 5월 13일)는 필리핀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작가, 정치인이다. 필리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필리핀에서 그는 "위대한 마비니, 혁명의 뇌" 등으로 불린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 민족 해방과 혁명운동

1864년 7월 23일 필리핀 바탕가스의 탈라가 농촌 출신으로 마닐라의 산후안데레트란대학에서 수학하고 1894년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아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법률가가 되었으며, 열강의 침략이 가시화 되고 있는 가운데 그는 독립과 독립 이후의 혁명정부를 꿈꾸었지만 투옥 생활을 반복했다.

1896년 8월 민족주의자 반란에 가담해 애국지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에밀리오 아기날도 등과 같이 스페인 등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에 참가했다. 1897년 병중에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는 독립 운동에 가담했으며 카티푸난의 이론가이자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스페인-미국 전쟁 당시 그는 아기날도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미국과 손잡을 것을 주장했다. 필리핀 혁명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외무부장관에 선임되었다.

▲ 미국 갈등과 최후

미국과 필리핀 혁명 정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그는 평화를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 중 그가 제시한 조건에서 미국인들이 아기날도의 새로운 정부와 마비니 내각의 자율성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조건이 있어 미국 측은 협상을 거절했다.

그는 미국의 협상 거부가 필리핀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고 독립 전쟁을 결심한다. 1899년 5월 7일 일단 총리직을 사임했고 1899년 8월 혁명국회에서 대법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898년 9월부터 최초의 현대 ‘필리핀 헌법’ 초안을 작성한다. 이어 10월 교역도시 말로로스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이를 발표했다.

그는 미국헌법을 참조해 이와 유사한 헌법에 기초를 했다. 스페인을 몰아내고 독립하는데 성공했지만 다시 미국의 필리핀 침략이 가시화되자 그는 미국의 영향력 확장에 맞서 자립론을 주장했으나 미국이 필리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를 합병하려 하는 것으로 보고 아폴리나리오는 아기날도와 다시 독립운동을 벌였다.

필리핀 지폐 1페소 '마비니'
필리핀 지폐 1페소 '마비니'

1899년는 미국에 의해 강제로 해임당한 뒤, 미국 식민지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01년 괌으로 유배되었다.

옥중에서 심해진 질병으로 운신이 불편한 그는 마닐라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정치 기사와 칼럼 등을 작성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저서로는 사후 출간된 ‘필리핀 혁명 La revolución filipina’가 있다. 1903년 2월 다시 풀려나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5월 13일 콜레라에 걸려 마닐라 외곽의 자택에서 39세로 사망했다.

▲ 필리핀 지폐 주인공

그의 집은 1968년도 사적지로 공인되어 생존당시 고가구, 도기 및 식기류, 부엌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그대로 보존, 현재 ‘마비니 기념관’으로 개편됐다.

필리핀 독립 이후 필리핀 지폐 1페소의 주인공이며 후에는 10페소에 도완 되었다. 그 뒤 현행 필리핀 화폐 10페소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함께 공동으로 도완 되었다. 혁명정부를 구상해 낸 필리핀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후에 필리핀의 국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출처: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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