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28일]“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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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28일]“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4.2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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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545년 오늘(음 3월 8일)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 이순신이 태어난 날이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당리당략에 빠진 뭇 위정자들로부터 모함과 박해를 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흩어진 군기를 바로 세우며 왜군과 맞서 싸운 충신이었다. 또한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고, 어린 왜군 포로에게까지 온정을 베푼 의인이자 인도주의자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충무공 하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충무공 영정(정읍 충렬사 봉안 1962년 월정 장우성 그림)
충무공 영정(정읍 충렬사 봉안 1962년 월정 장우성 그림)

 

▲잠룡 시절

어린 시절 동무인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매우 영특하고 활달해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즐겨했으며,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회고했다

1565년(명종 20년) 이순신은 상주 방 씨와 혼인하여 이회, 이울, 이면 등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지만 시험 도중 낙마로 낙방한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2월 31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해 함경도 지역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며 활약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전라좌수영(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부임 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세계적으로 평가될 철갑선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한다. 또한 부하 장수들을 차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반복 실행했다.

▲23전 23승의 연승 신화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5월 4일 최초의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거둔다.

옥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우고 왜군들에게 두려움을 준 것은 거북선이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남해의 바다에서 연전연승했다.

1592년(선조 25) 6월 한 달 동안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왜장을 죽이고 왜선을 크게 격파해 조선 수군의 명성을 크게 떨쳐 왜군을 역으로 위협했다.

또한 7월에는 한산도에서 왜군을 다시 한번 크게 무찔렀는데 이 전투가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대첩이다.

1598년(선조 31) 11월 본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모두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 땅을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한 왜군을 처단하기 위해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을 설득해 노량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마지막 일전을 치러 적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전사한다.

이순신의 전공(戰功)으로 동쪽 일부를 제외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일방적으로 밀렸던 임진왜란 초반의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승리의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주력선인 판옥선의 견고함 그리고 강력한 화포가 있었다.

 ▲거북선

임진왜란 초반 해전에서 돌격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거북 등 모양의 지붕과 갑판을 얹어 제작한 돌격 전함으로 앞에는 용머리를 두어 화염을 뿜었고, 옆에는 화포를 장착한 돌격 전함으로 귀선이라고도 불린다.

‘태종실록’에 위하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왜구의 격퇴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장갑선으로 보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실용화되었으며, 이후 조선 말기까지 변형된 형태로나마 각 수영에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거북선에 관련된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된다. 

①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있었으나 이때의 거북선은 실전에 활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이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② 과연 ‘철갑선’인가?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일본 측 문헌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패전을 거북선에 돌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 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일부 학자들은 철갑을 덮을 경우 배의 무게가 증가하여 민첩성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는 등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덕수이씨 충무공파 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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