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독립유공자 737명 발굴 포상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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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독립유공자 737명 발굴 포상 신청
  • 문종권 기자
  • 승인 2020.04.0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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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천대학교]
윤귀룡(함북 경성), 장석영(경기 강화), 한경익(북간도), 황금봉(함북 명천) 1차(징역 6월), 2차(징역 8년), 3차(징역 2년) 위 왼쪽부터[사진=인천대학교]

[미디어인천신문 문종권 기자] 인천대학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을 맞아 737명 독립유공자를 발굴, 국가보훈처에 포상ㆍ신청을 한다.

인천대는 지난해에도 765명 독립유공자를 발굴, 국가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한 바 있으며, 이번 신청에 앞서 8일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설명회를 가졌다.

이번 대상자는 3․1독립만세시위 유공자 348명과 간도와 함경도·경상도 지역에서 반일활동을 펼쳤던 정평청년동맹·안동청년동맹 등 반일활동 유공자 234명, 추자도 1·2차 어민항쟁과 제주혁우동맹 등 반일농어민활동 유공자 73명 등 737명이다.

이들 중 10여 명을 제외하고 모두 판결문을 거증자료로 제출했으며, 관련 서류는 3만여 장에 이른다.

대상자 중 전북 장수의 김해김씨는 호남 연합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전해산(全海山)의 부인으로 족보나 제적등본에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남편이 의병장으로 활동하자 일본군경의 모진 압박을 겪었다.

교수형으로 순국한 남편의 유해가 대구감옥에서 전북 장수로 운구되자 장례를 치렀고 상여가 집 앞 개울을 건너자 집으로 들어와서 극약을 먹고 자결함에 따라 남편의 상여가 되돌아와서 쌍상여로 장례를 치른 분이다.

또 경남 양산의 의병장인 김병희(金柄熙)·김교상(金敎相) 부자(父子)는 모두 정3품관을 지냈으며, 양산의 거부(巨富)로 동향의 서병희(徐炳熙) 의병부대에 당시 2천석 쌀값 거금 5천 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사병 형식의 산포수를 중심으로 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격전을 치른 후 피체되어 손바닥을 철사로 꿰어 양산시장에 조리돌림을 당한 후 피살, 순국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부자이다.

독립군 소위 출신 계기화(桂基華) 지사는 1932년 통화현 군관학교를 거쳐 한국인과 중국인 혼성부대였던 요녕민중자위군에 참여, 일본군과 싸웠고 양세봉 장군이 이끈 조선혁명군에 참여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자신의 삶과 독립군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기록한 자료는 독립기념관에서 중요기록물로 간행된 바 있었지만, 정작 기록물의 주인은 아직 포상이 안 된 상태이다.

그 외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을 3차례에 걸쳐 10년이 넘게 옥고를 겪었던 함북 명천 출신의 황금봉(黃金鳳) 지사도 이번 포상 신청대상자로 올랐다.

이날 참석한 순국선열유족회 임원과 지광회 임원들과 독립기념관 서보현·전영복 이사는 이구동성으로 불철주야 노력한 이태룡·이윤옥 박사의 노고를 치하했다.

조동성 총장은 “우리 대학에서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은 약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500명이 넘었다"며 "매년 1천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민족대학으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태룡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국가기록원에서 남한의 재판기록조차 아직 70% 이상 공개하지 않아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하루빨리 공개되어야 하고, 국가보훈처는 많은 인원을 동원, 수많은 포상 대상자를 신속하게 심의해 주기를 간절히 요망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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