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22일] 러시아 혁명에 불 지핀 ‘피의 일요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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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22일] 러시아 혁명에 불 지핀 ‘피의 일요일 사건’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1.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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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이다.

'피의 일요일' 시위모습
'피의 일요일' 시위모습

노동자들이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을 위해 겨울 궁전으로 향하던 평화적 청원 행진을 정부 당국이 근위군을 동원해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러일 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였다.

러시아 민중은 정교회의 영향하에 황제 숭배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기독교(정교회)의 수호자이다. 즉 황제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민중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정세가 개선될 것으로 믿었다.

청원 행진에 앞서 거행된 파업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이 참가했다.

유혈사태

동궁 앞에서 일어난 비폭력시위
동궁 앞에서 일어난 비폭력시위

평화행진에는 6만 명이 참가했다.

러시아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다.

그러나 너무 인원이 많았기에 진입을 막지 못하고 결국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했다.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유혈진압했다.

현재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불명확하다. 대략 500∼600여 명이 죽고 수천여명이 부상당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져 나갔으며 이로 인해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의 불씨

사건 이후 황제 숭배의 환상은 깨진 가운데 같은 해 러시아 혁명’(제1차 혁명)이라고 불린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이 발발하게 됐다.

이때 시작된 러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 러시아 혁명(제2차 혁명)의 원동력으로 성장해 성난 제정 러시아 민중들이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이로 인해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이 가속화됐다.

사학자 ‘라이오닐 코찬’은 그의 저서(1890-1918년 러시아 혁명)에서 피의 일요일 학살사건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끈 핵심 사건으로 간주했다.

▲‘가폰‘ 신부의 평화시위 주도

'게오르기 가폰' 초상화
'게오르기 가폰' 초상화

이 사태의 리더는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게오르기 가폰’(1870년 2월 17일~ 1906년 4월 10일)신부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가폰 신부의 주도 하에 청원 행진이 진행됐다.

가폰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이자, 국가 비밀경찰의 급여를 받는 공작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가폰이 이전부터 조직했던 노동자 집회는 당일 해산되었고, 그는 즉시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에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1906년 4월 사회혁명당에 의해 암살됐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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