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칼럼] 옛날 옛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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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칼럼] 옛날 옛날에...
  • 이영수 기자
  • 승인 2015.10.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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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국장
 #동호직필(董狐直筆). 기원전 600년쯤. 수많은 열국들이 우후준순 생겨나고 사라지던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에 7살의 어린 왕이 용상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 영공(靈公)이다. 당시 진나라 실세는 조씨 일가였다. 어린 영공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20살이 됐을 무렵 온갖 패악질을 하며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이때 재상이었던 조순(趙盾)은 이러한 영공의 행동을 질책하며 정사에 열중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진영공 측근들은 눈에 가시 같은 조순을 살해하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조순은 국경 부근까지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조순은 자신의 동생이 진영공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조순은 곧바로 궁으로 돌아와 임금을 세우고 동생을 쿠데타 주범으로 몰아 처벌하는 등 강력한 정치를 이어갔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사관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호(董狐)였다. 동호는 “조순이 임금을 시해하다”라고 기록했다. 이를 본 조순은 “내가 국경에 피신해 있을 때 임금이 살해됐고 진영공이 살해당하자마자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동생을 법에 따라 처형했다. 그러니 내가 진영공을 살해했다는 누명은 옳지 않다”며 기록을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동호는 “조순은 피신하였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고 재상직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니 왕이 살해당한 것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정당하고 변경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서슬 퍼렇게 기록 변경을 요구하던 조순은 어쩔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동호직필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이를 두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법을 굽히지 않고 곧게 썼으므로 훌륭한 사관이며. 조순은 법을 위해 악명을 감수했으니 훌륭한 대부”라고 칭송했다. 정확한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권력을 통해 부끄럽지만 바꾸지 않은 역사적 교훈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장공(庄公)은 여자를 몹시 밝혔다. 술과 여자를 탐닉하며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소문을 듣게 됐다. 자신의 스승이면서 재상으로 있던 최저(崔杼)의 첩이 절세미인이라는...호기심에 가득찬 장공은 최저 몰래 최저의 첩인 당강을 궁으로 불러들여 겁탈했다. 그 후 당강의 미모에 빠진 장공은 수시로 최저의 첩과 잠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최저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했다. 분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최저는 장공을 시해하고 허수아비 왕을 옹립한 뒤 전권을 휘둘러댔다.

 이를 보고 있던 제나라 사관 태사 백(伯)은 “최저가 군주를 시해하다”라고 적었다. 이를 본 최저는 노발대발하며 “장공은 임금이 아니다. 그는 간통한 음흉한 사내일 뿐이다. 그러니 하극상에 해당하는 시해라는 용어 보다 주살(誅殺) 혹은 극(殛)이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며 기록을 변경을 지시했다. 그러나 백은 최저가 장공을 살해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을 제시하며 이를 거절했다. 결국 백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백이 처형된 후 사관을 맡은 동생 중(仲)과 숙(叔) 역시 “최저가 군주를 시해하다”로 기록했다 죽음을 당했다. 막내 동생 계(季)마저 죽음을 불사하고 “최저가 군주를 시해하다”라고 기록하자 결국 최저는 기록 변경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관의 명백한 기록이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정사를 기술했다며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는 사마천은 흉노와 싸우다 포로가 된 이릉을 옹호하다 한나라 무제에게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이 죽음 대신 궁형을 택하자 대다수 사람이 사마천을 조롱했다. 그래도 사마천은 개의치 않았다.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 옥고를 치를 때였다. ‘임안’이라는 장군이 사마천을 찾아와 “궁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마천은 “싫다. 끝까지 살겠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10~15년 후에 말하겠다”면서 거절했다. 그 후 임안 장군이 역적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당시 자유로운 몸이 됐던 사마천이 임안 장군을 찾아가자 임안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처럼 궁형을 당하느니 형장에서 죽겠다”고.

 그러나 사마천은 차분히 응답했다. “내가 사는 이유는 역사를 쓰기 위한 것이다. 이 나라의 간신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놓고, 임금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역사에 남기겠다는 것”이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를 들은 임안 장군은 크게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근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이다. 각종 여론조사 기관이 발표한 결과를 보면 국사 교과서 국정화 찬성과 반대가 엇비슷하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여야 정치권이 서로 물어뜯으며 공격하고 있다. 정치 쟁점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현재 국사 검정 교과서 집필진 가운데 90%는 죄편향”이라며 “국정화를 통해 올바르고 일관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국정화 시도는 친일과 독재를 미화시키려는 것”이라며 “역사 왜곡이 심각히 우려된다”며 박근혜 대통령과 김 대표 선친들의 행적을 겨냥했다.

 정치권의 입맛에 맞게 기술되는 역사는 사실에 근거한 진정한 역사가 아니다. 이념이라는 색깔이 입혀지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국사 교과서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좌‧우, 여‧야를 떠나 사실에 근거한 공론이 필요하다. 빛이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빛으로 변하기 이전의 순수한 빛의 상태를 토론해 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일 조차 정립하지 못하면서 불거져 나오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왠지 달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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