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권 아라칼럼] 자본으로부터 버림 받는 정신문명, 그리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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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아라칼럼] 자본으로부터 버림 받는 정신문명, 그리고 시
  • 장종권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 승인 2015.10.0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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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생산력과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가 꼭지점에 올라서고 있다.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누구에게나 먹음직스러운 사과였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영원성을 추구하는 생명체에게 자신의 터전을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 행위에 가깝다 할 것이다. 남보다 더 자신의 터전을 확보해야만 자유롭고 건강한 나의 생명활동이 가능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허황된 생각이지만 나의 능력으로 나의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는 전혀 죄악이나 잘못이 아니다. 모두가 잘 살자 하는 것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이 끌어가는 과학문명의 발전은 정말 인류의 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을까. 과학의 선두주자가 방위산업이라고 본다면 인류는 가공할만한 공포심을 느껴도 부족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미사일과 핵의 공포 속에서 늘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며, 대륙을 목표로 하여 바다와 우주를 점령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첨단기술 개발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또한 전쟁 이전에 인류는 발전된 대형 산업구축물에 의해 대량으로 희생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급자족하면서도 그렁저렁 살아왔던 원시사회가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는 그때대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 오늘날이라면 한 번쯤 원시시대를 돌아보며 무엇이 잘못이었던지를 짚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의학의 발전은 인류의 건강과 장수의 길을 열으며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인간의 수명을 늘린 댓가로 우리의 후손들은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 아직은 오리무중인 상태다. 노동의 능력을 상실한 이후 수십 년을 더 산다는 것은 노동의 이윤화가 핵심인 자본주의의 속성에 맞지 않는 부분일 수도 있지는 않을까. 노인들의 인간다운 건강 유지와 노인들의 노동력이 유용해지는 사회를 동시에 만들어 갔어야 옳지 않았을까. 거대한 제방도 무심히 방치한 구멍 하나로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 자본이 끌어가는 세상, 과학이 끌어가는 세상, 문제는 없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두드리면서 여유 있게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은 드디어 물질문명의 발전에 모든 동력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문명은 도대체 무엇이 이끌어 가야 하나. 돈이 되지 못하는 예술은 누가 이끌어 가야 하나. 정신과 철학이 부재한 발전도 발전일 수 있을까. 철학하는 노동력은 이윤이 생기지 않는 노동으로 전락하고, 시를 쓰는 노동력은 베짱이들의 낭만으로 치부되어 전혀 노동력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시인들이여, 더 이상 시는 써서 무엇 하자는 것이냐. 인류의 발전과 행복이 물질문명의 발전에만 있다고 믿는 이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노동력을 인정할 날이 오리라 믿느냐. 한 편의 시에 정당한 이윤을 붙여주는 날이 진정 오리라 믿느냐. 정신문명의 가치를 믿다가,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다가, 마침내 대한민국의 숱한 문학잡지들이 자본의 늪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가고 있다.

 ◇ 장종권
 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 '아산호 가는 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호박꽃나라' 외. 장편소설 '순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 인천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계간 리토피아, 아라문학 주간.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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