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1월 3일] 세계적인 현대 음악 작곡가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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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1월 3일] 세계적인 현대 음악 작곡가 ‘윤이상‘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11.0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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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윤이상(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3일)은 독일에서 활동한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이다. 1959년 발표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과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이름을 알렸으며, 북한 TV 드라마 ‘민족과 운명’ 5부~8부의 모델이 윤이상이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다.

작곡가 윤이상
작곡가 윤이상

▲ 학업

1917년 9월 17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통영에서 수학하며 성장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해 오사카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화양학원의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와 작곡을 독학했으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발표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8·15해방 후에는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했으며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으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 등의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6년 ‘현악 4중주 1번’, ‘피아노 트리오’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선진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배우기 위해 그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 유학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그는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독일에서는 베를린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졸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인연을 만들어 갔으며 이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는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 등을 초연했다.

그의 음악은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켜 당시 음악계에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에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가족이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하게 되고,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후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동백림사건 당시 윤이상
동백림사건 당시 윤이상

▲ 동백림 사건

윤이상은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오랜 친구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했다. 그러나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고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됐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에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된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 받았고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었으며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했다. 그는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의 한국인 제자로는 서울대학교 작곡가와 교수를 역임 한 강석희, 백병동이 있으며, 그들은 동백림 사건 당시 옥중에서 윤이상이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 귀화

윤이상은 이 사건이후 1971년 서독으로 귀화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왕래해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도 그의 음악을 해제해 연주할 수 있게 되어 1988년에는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 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이에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

1995년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 후 북한의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 터에는 윤이상 기념관 및 윤이상 거리가 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주요 작품

작품으로는 4편의 오페라 ‘유동의 꿈’(1965), ‘나비의 미망인’(1967), ‘요정의 사랑’(1969), ’심‘(1971)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등의 독주,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과 ’교향곡 제1~4번‘(1982~85), 성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등 다수의 협주곡과 실내악곡이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유럽의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중요한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해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독창적인 작곡기법인 주요음 기법과 주요음향 기법을 개척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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