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 7일] 항일독립운동단체 '한국노병회' 창건 주도한 ‘김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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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 7일] 항일독립운동단체 '한국노병회' 창건 주도한 ‘김인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10.07 13: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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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 한국노병회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기독교 목사로도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인전(金仁銓 1876년 10월 7일~1923년 5월 12일)’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그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는 상해 한인교회 강론에서 “자신의 이해에 따라 처신하지 말고 나라를 회복하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항일정신으로 무장하자”고 말했다. 그의 항일 독립운동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 출생과 기독교 입문

독립운동가 '김인전' 선생
독립운동가 '김인전' 선생

그는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에서 수원 군수를 역임한 부친 김규배(金奎培)와 모친 김씨 사이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경재(鏡齋, 經齋)이다. 그는 6세 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남들과 다르게 총명해 유교 경전과 제자백가·불교·도교 등에도 학문적 조예가 깊었다.

부친 김규배는 개화사상을 신봉해 기독교에 입교해 이상재 선생과 황성기독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을 펼친 개화 지식인이었다.

그는 부친의 영향으로 27세 때인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해 기독교의 자유·평등사상과 서구 문명의 수용을 통한 사회의 개혁과 조국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당시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과 8월 22일 대한제국 내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로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다.

▲ 목회자로서 독립운동 활동

그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1906년 11월 가산 출연 향리인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한다.

이후 1910년 학교 운영을 작은아버지에게 인계하고 3·1운동 민족대표인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양전백 목사,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던 송병조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전주 서문외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고 목회 활동과 성경학교 교수, 전북노회장 등의 교직을 이용,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전도 활동을 펼치며 담임하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에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단체인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를 조직한다.

그는 1919년 3·1운동 기간 중 군산에서 3월 5일부터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으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전주에선 3월 13일 선생의 지도로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 교사, 기독교신자들이 천도교 측과 합세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전라도 지방 만세 시위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돼 일경의 표적이 되자 지속적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 상해 임시정부 

그는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으로 임명돼 안살림을 담당하고 공채 발행을 통한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에 애쓴다.

1920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재무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상임위원회, 정무조사특별위원회 군사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1921년 4월 6일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에 선출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임명과 상해 대한교민단에서 운영하던 인성(仁成)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1년 11월 11일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신익희 등 동료 의원 25명 전원과 함께 “세계의 평화, 동아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하여 한국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하는 외교 독립운동을 펼친다.

이와 함께, 송병조·손정도·김병조·이원익 등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야소교(예수교)진정회’를 통해 각국 정부와 교회 단체에 한국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태평양회의는 일제의 국제적 위상만 높여준 채 1922년 2월 끝난다.

그는 1922년 2월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위원회 위원장과 내외무상임위원회·재무상임위원회·교육실업상임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해 선출되어 활동한다.

같은 해 3월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해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과 경제 문화운동에 상호협력하는데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 '한국노병회' 창건

그는 지난 태평양회의에서의 외교 독립운동이 성과 없이 끝난 후 무장 독립투쟁의 필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1922년 10월 1일 상해에서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모두가 노동하며 군인이 되자”는 노병일치 독립군 양성과 지원단체인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논의한다.

당시 “조국 광복에 공헌하기 위해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 양성과 100만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적으로 그해 10월28일 ‘한국노병회’ 창건을 주도한 그는 이사 겸 경리부원으로 일한다.

1923년 1월에는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 속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3월 3일부터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해 조국 광복의 새로운 방략 모색과 독립운동세력 통합, 독립운동의 통일적 최고 기관으로의 임시정부 개편 등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던 그는 심신의 피로가 겹쳐 5월 3일 쓰러지고 말았고, 상해 동인(同仁)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5월 12일 48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그의 장례식은 5월 14일 임시정부 주관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해 프랑스 조계내 외인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유해는 이후 중국 정부에서 이장해 상해 송경령 능원내에 안치되었다가 1993년 8월 박은식·신규식·노백린·안태국 선생 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선생을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김인전 선생'의 장례식 사진
'김인전 선생'의 장례식 사진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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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0-08 11:51:30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http://blog.daum.net/macmaca/3162


윤진한 2021-10-08 11:50:57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1914년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은 이렇습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윤진한 2021-10-08 11:50:04
고종밀명받은 유림들.대한독립의군부조직,대규모 독립운동획책,발각.

유림들이 3.1운동에 참여치 않은것은,그 선언서에 왕정유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왕당파 유림이 참여하기 곤란하여서 그러함. 고종의 승하때문에도 일어난 3.1운동임. 구한말 의병과 고종의 밀칙받은 유림들의 항거로 임시정부가 수립된것임.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이, 귀양에서 돌아온 뒤인 1912년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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